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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응원합니다, '청년구직활동 지원금'>

 

   유행처럼 번지거나 혹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불거진 사회의 단면들을 핍진하게 다루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N포세대, 니트족, 캥거루족, 프리터족 등’ 청년을 비추는 단어들은 대체로 불우한 것들이 많았다. 나 또한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회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좌절과 넘어짐 속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청춘 드라마나 소설의 어느 한 장면이 아니라면 확정된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선득하니 찬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렇기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구직 활동에 말이다.

 

   교단에 서는 꿈을 꾸며 부단히 공부를 해야 할 때 사실상 공부를 하면서 드는 비용들을 온전히 공부만 하면서 감당하기에는 힘든 측면이 많았다. 군대를 갔다 온 후 졸업을 하기까지 2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진 않았고, 설사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 하여도 그 도움의 수위나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일을 하자니, 공부와 병행해 그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쉽지 않았고, 공부만 하자니, 경제적인 부담에 걱정이 앞섰다. 그때 청년의 구직활동을 지원해 주는 국가사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총 6개월 동안 매달 5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자격 조건도 충분했으며 무엇보다 주어지는 50만 원이라는 금액이 구직활동과의 관련성만 소명한다면 상당히 폭넓게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니깐 구직 활동의 주체인 청년이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계획에 보조를 맞춰 금액을 배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신청 방법도 간단했다. 몇의 서류와 구직 계획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면 된다. 확정이 되면 사전 교육을 이수하고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이후 매달 50만 원을 지급받고, 사용 내역을 구직 활동과의 연계성 속에 소명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직업 관련 동영상을 보는 실질적인 청년의 구직 활동을 돕는 탄탄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원금을 받고 나서 많은 점이 달라졌다. 학원비에 대한 걱정에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각종 교재나 원하는 책을 부담 없이 사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식비로 사용 가능하기에 공부에 기초가 되는 체력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후불 교통카드로도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사실상 임용 공부를 하는 데 드는 포괄적인 비용을 대체로 감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안정감을 기반으로 한 정신적인 안정감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기회비용을 따지며 한정된 경제적 자원 속에 셈을 해야만 했던 과거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었다. 임용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비용을 비교적 고민 없이 경제적으로 충당하며 조금은 구체적인 교단에 선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고, 성공적으로 교단에 선다면 사회적으로도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며 다시금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점이 뿌듯하기도 했다.

 

   해당 제도가 ‘실질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직접적인 구활활동 외에 간접적인 방식의 포괄적 구활도 그 범위로 인정시켜 줬다는 점이다. 구체적 사용 지침이 정해져 그 범위가 한정되었다면 오히려 강한 경직성 때문에 자신이 목표했던 구직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포괄성은 청년을 생각한 제도란 느낌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별 직업 관련 시설과의 연계를 통해 정보의 부족으로 편협한 시각을 가져야 했던 과거의 구직 활동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VR을 이용한 가상 모의 면접이나, 자기 소개서를 분석해 주는 프로그램 등은 불평등에 민감한 청년들의 도착선을 평등하게 맞춰주는 교정 제도란 느낌도 강렬했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만 같았다. 풍파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버티고 설 버팀목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구직활동금을 통해 일정부분 느낄 수 있었다.

 

   막막하고, 불안했다. 청춘의 ‘춘’자가 ‘봄’이라는 의미라는데, 내 가지에는 아직 움도 트지 않은 것만 같았다. 고목인가 싶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신산하고 황폐한 내면이라면 아무리 사철 푸르른 소나무라도 그 푸름을 잃을 것이고, 봄이라는 계절은 무색해질 것이다. 50만원이라는 금액이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을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 금액이 내가 다시 나목임을, 그 가능성을 알려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봄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50만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제도라고 생각한다.

 

출처, YES24, 책 이미지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남으로부터 내가 사랑받는 길이고..

 

내가 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출발점입니다.

 

 

법률스님의 희망편지 『힘내라 청춘』 中

 

   법률스님의 즉문즉답이 담긴 책의 일부분이다. 다시 열정을 갖고 구직 활동을 하면서 문득 떠오른 책이었고, 낮아진 자존감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이대로 쭉 밀고 나간다면 분명 밝은 미래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

 

'청년구직활동 지원금'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온라인 청년센터

https://www.youthcenter.go.kr/main.do 

 

를 참고하면 된다.

 

 

 

 

 

 

 

 

 

 

 

 

 

 

 

순수문학의 지향 '김동리'


 

국어과 교육과정을 살펴 보더라도, 항시 '사회 문화적인'  즉, 소통맥락 상에서 '반영론적' 관점 상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일이 정말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데 김동리는 문학이 시대의 거울이 되고,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달랐다.

 

김동리가 지향하는 문학세계 자체가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다루는 내용의 범주 또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이나 운명과 같은 순수한 것들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김동리는 1913~1995년까지 다른 문인들에 비해 꽤나 긴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지나쳐온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면면들이 그의 작품 속에는 녹아들어 있진 않다.

 

응당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라면, 일제의 수탈이나, 광복 후의 혼란상을 담은 작품들을 쓰기 마련이었지만, 김동리만큼은 달랐다.

 

그래서 그가 휘말렸던 논쟁이 바로 '순수 문학 논쟁'이다.

 

총 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 1차

 

당시 20대였던 김동리와 30대였던 유진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비평의 용어로 순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39년의 임화지만 이 말에 역동성을 부연한 것은 유진오다. 논쟁의 중요한 동기를 이룬 대목은 다음의 몇 줄이다.

 

나는 일개 문단인으로서 문학에 있어서의 순수라는 것을 생각하기에 요새보다 더 절실한 때가 없다. 순수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비문학적인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를 두고 말함이다. 문단의 사조가 전면적으로 혼돈 속에서 헤맬 때, 문학인, 지식인의 긍지와 특권을 유지, 옹호해 주는 것은 오직 순수에의 정열이 있을 뿐이다. (순수에의 향 - 특히 신인작가에 관하여)

 

유진오가 이와 같이 신인작가의 (당시 20대였던 김동리는 막 등단한 상황이었다.) 문학정신이 순수하지 못함을 지적했으며, 이런 지적을 통해 촉발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제 2차

 

두 번째 논쟁은 당시 30대 비평가인 김환태가 김동리의 논리에 동조하는 글을 발표하자, 그것을 다시 이원조가 반박한 30대끼리의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제 3차

 

세 번째의 순수문학 논쟁은 김동리와 김동석에 의해서 전개된다. 김동석이 <순수의 정체>라는 글을 통하여 순수문학의 논리적 맹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순수문학과 관련하여 순수함과 비순수함에 관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는 측면에선 상당한 의의를 지니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론자들이 문학의 독자성만을 내세우고 고집함으로써 문학이 당연히 포괄하여야 할 사회적, 역사적 현실이 배제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작게는 문학정신의 왜소화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지나치게 축소화한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논쟁에 말려든 만큼 김동리는 동반자 작가나 카프문학 즉, 특정 목적성을 띤 도식적 문학을 지양했으며, 참여문학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써 지금에까지 김동리는 '순수문학'의 큰 상징성을 갖고 있는 작가이며, 지나친 순수성의 추구가 후대의 평가에 있어 비판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견 김동리의 등단작인 '화랑의 후예'는 그의 거대한 문학관에 빗겨나가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의 심벌'로 대변되는 당대 무기력한 조선인의 모습 그리고 그 전형성을 갖고 관찰의 대상이 되는 '황진사'라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당대 조선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화랑의 후예'는 시대착오적인 발생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저 양반의 지나친 허세에 빠져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인칭 관찰자의 객관적 시점으로, 서술자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설상의 전개를 바탕으로 '조선의 심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숙부는 대종교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하는 등 일제 시대라는 암흑기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며, '황진사'에게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상당히 온정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극단에 서 있는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서도 '황진사'의 여러 일화와 대사와 행동들이 참, 우습거나 눈살을 찌푸르게 만든다.

 

그렇다 김동리의 순수문학의 세계관 속에서 '화랑의 후예'는 예외작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김동리는 황진사의 모습을 통해 전통이 왜곡되게 전달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기 보다는 조선의 전통 자체에 관심을 보이며, 그런 전통이 올바르게 계승 되기를 희구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렬하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전통 계승의 전형적 예시를 보여줌으로, 이러한 잘못된 사례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법으로 전통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이 외에 작품들 대표적으로 '등신불, 바위, 역마, 까치소리' 기구한 삶의 역정이나, 운명론적 세계관 등 인간 본연의 모습과 그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바위의 경우는 문등병에 걸린 여자의 기구한 삶의 모습, 역마의 경우는 역마살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총체적 언어교육


 

 

근래에 각광받고 있는 교수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부분에서 용어와 관련한 정리가 필요할 듯싶지만, 대체적으로 모형, 원리, 과정, 유형 등의 교육론과 관련한
단어들은
미세한 의미의 차는 있으나 같은 범주 내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총체성이라는 단어는 문학교과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총체성을 언어 교육에서 정의할 때 언어와 학습, 학습자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일련의 신념을 바탕으로,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상황(혹 자연적인 상황)에서 구어와 문어가 통합되어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교육을 말한다.
[국어교육학사전]

 

결과적으로 분절적으로 구분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의 하나를 지향하며, 나아가 실제적이고 상황에 적절한 구성주의적 지식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체성의 입장에서 수업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의 행태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분절된 부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 그 맥락과 같이 제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총체성을 중요시 여기는 총체적 언어학습의 경우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중요시 여긴다.

 

전체성, 자연성, 통합성, 사회성

 

전체성이란, 말 그대로 부분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를 제시해 줘야 하며, 확장된 개념으로 학습자들의 부분적인 삶의 양태 보다는 이어지는 삶의 전체성의 측면에서, 단순 단위학교의 수업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로까지 연계되는 전체성을 뜻하는 것이다.

 

자연성이란, 전체성과 상당한 교집합을 형성하며, 있는 그대로의 학습자를 존중하면서 그들이 지니는 개인적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기존 교과서를 살펴 볼 경우 제시된 텍스트의 경우 일부가 생략 된 불완전한 텍스트가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총체적 언어학습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텍스트를 지양해야 하며, 작품 수다 다룰 수 있는 내용을 줄어든다 할지라도 전체를 제공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인간의 개작을 바탕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텍스트를 재단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통합성이란, 대표적으로 언어 기능간의 통합 이를 교과 내 통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과 간, 단위 학교와 지역 사회 간의 통합을 들 수 있다. 이는 최근 15개정 속에서도 연계라는 개념으로 잘 나타나 있다.

 

사회성이란, 언어 학습은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말 그대로 혼자 하는 학습이 아닌 집단 내에서의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학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해 봤을 때 총체적 언어학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학습자에 대한 신뢰가 형성 돼 있어야 한다.

또한, 전체주의적인 중앙 집권과 통제 보다는 학습자들의 개성화, 개별화 교육을 강조한다.

 

총체적 언어 학습에서 언어 학습에 대한 관점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야 한다.

둘째,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를 가르쳐야 한다.

셋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풍부히 하고 이 과정에서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하면 언어 학습은 촉진된다.

넷째, 실제 목적을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다섯째,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지나치게 형식이나 체계, 즉 문자나 맞춤법에 매몰되기 보다는 주어진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맞춤법을 등한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 언어 학습의 경우 특히 언어 기능을 사용하는 부분이나 문학 영역에서 많이 활용할 수 있다.

 

총체적 언어 학습을 하나의 철학이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이나 관점이 반영 된 구체적인 교수, 학습 방법으로는

 

: 쓰기 워크숍, 언어 경험 접근, 자유 독서법 등이 있다.

 

 


 

 

'총체적 언어학습'과 관련한 내용을 pdf로 첨부합니다. 따로 보충자료를 보완하여 만들었습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으니 댓글로 비밀번호를 요청해 주세요

&lsquo;총체적 언어교육&rsquo;.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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