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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 현진권


 

 

  후덕한 인상을 가지신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현진권이다. 그의 글은 하나같이 골수를 쪼개는 칼이 있어,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진권의 '운수 좋은 날'은 각종 패러디를 통해 우리에 익숙하며, 전문을 읽은 사람은 드물지라도, 설렁탕을 사 오는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는 이는 많을 것이다.

  기본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생애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1900년 8월 9일 대구 출생으로 대대로 역관 출신이 많은 집안이었다. 또한, 그의 부친 현경운은 신진 관료로 자식들의 신식 학교 출입과 외국 유학을 허락한 개화 인사다. 그의 모친인 이정효는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고, 15세의 나이에 일찍 결혼하게 된다. 이런 작가의 생애가 반영되어, 어머니의 결핍과 결혼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일부 작품에 반영 되어 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자리까지 오릅니다.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년간 투옥 되게 됩니다.​

  그의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희생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할머니의 죽음',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정신병원장', '고향',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는 미완성 소설입니다.)

  ​현진건의 소설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백조>동인 활동 당시 대표적으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를 들 수 있으며, 식민지 현실을 다루고 있는 '고향', '운수 좋은 날', '신문지와 철장' 그리고 역사소설인 '무영탑', '흑치상지', '선화공주'를 서술한 시기 즉, <백조>활동 당시, 식민지 현실 반영 소설 창작 당시, 역사소설 집필 당시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작품은 가부장적 사회에 관한 폭로와 개화기 지식인의 무력감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 더불어 현진건의 심리가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예술은 예술적 가치만 있으면 물론 훌륭한 예술이다. 그러나 내용적 가치가 문예작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 않을 수 없다.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을 짓는 걸로서 또는 얻는 걸로써 만족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만족치 않는 이도 많은 줄 안다. 물론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이 인생에 필요치 않다는 건 아니다. 인생을 향상시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너무나 미약하다, 희박하다.

예술이 예술되는 소이연은 거기 예술적 표현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로되 그 결정된 예술이 인생에 대하여 중대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그 작품의 내용적 가치, 생활적 가치를 따라서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브센의 근대극, 톨스토이의 작품이 일대의 인심을 진동시킨 이유의 하나는 그 속에 있는 사상의 힘이다. 그 예술만의 힘이 아니다. 예술에만 숨어서 인생을 알라고 하는 작가는 상아탑 속에 숨어서 은피리를 불고 있는 세음이다.

문예는 경국의 대사라고 하지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생활의 제일이요, 예술이 제이다. (현진건 이러쿵 저러쿵)

  ​  현진건은 또한 무조건적인 예술지상주의를 경계하며 내용적 측면, 생활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의 작품 속 할머니, 인력거꾼, 김첨지, 순이, B사감, 유랑 노동자등의 처절하면서 고단한 삶의 단면을 통해 당대 조선의 얼굴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현실을 보며, 현실을 그릴 줄 아는, 현실에 관심을 두고 예술을 접목 시킨 사회파 작가라 볼 수 있다. 민중의 현실을 바라봤다면, 식민지 민중의 가난과 모순, 무기력한 지식인의 행각과 편협한 인심, 주변부적 존재들의 비참한 삶을 극적으로 재현한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문은 실상 인즉 기입니다. 기 없는 글은 아무리 진주 같다해도 곧 사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인께 모파상이나 체홉을 본뜨기 전에 뜌우마나 유우고오를 배우시도록 원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뒤늦은 소원이기도 합니다. (현진건 문장 인터뷰 )

    철학 없는 글, 사상과 생각 없이 오로지 재미를 위한 글은 실상 빈 껍데기와 같을 것입니다. 소비성 세상, 인스턴트 식품이 넘쳐나고, 상품이 되면 뭐든지 공장처럼 찍어내는 세상입니다. 텅 빈 글이 나온다는 것은 지금 사회가 텅 비어있다는 방증입니다.

  현진건은 역사소설도 집필했다. 역사소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설명했는데, 첫째 우연히 심금을 울릴 사실을 발견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례 둘째 작자의 주제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현대에 취재하기가 거북한 점이 있어 그 주제에 적당한 사실을 찾아내어 읽어놓은 사례이다. 현진건은 이 중 두 번째 사례를 ​높게 평가했다.

  많은 걸 느낍니다. 글은 곧 사회라는 그 말이 작가의 책무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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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린다. 그간 뭘 했는지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별다른 삶을 살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영역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으며, 응당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대해 충실했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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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폴 고갱에 관한 내용이다. 그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설가의 입을 빌려 탄생한 작품이다.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에 의존해 그것들을 이어붙이는 작업은 참 고된 작업이란 생각이 든다. 그 작업에는 끈기가 필요하다.

 

끈기란 것은 대상에 대한 애착이 빚어낸 강한 욕구일 것이다. 소설 속 폴 고갱은 참 기이한 인물이며 범인의 눈으론 이해 못할 예술혼을 지닌 존재이다. 그는 달나라의 토끼와 같이 이상의 눈을 지닌 사람에겐 보이지만 현실에 벽 속 즉,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그냥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폴 고갱은 오직 예술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평범하고 안락한 그리고 안정된 삶을 벗어 던져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추구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속물들의 눈 속 아니 속물이라 폄하할 수 없다. 보통의 삶을 살며, 삶 속에 예속된 우리의 눈에는 이해 못할 장면의 연속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고 그 시선 끝에 걸린 세계가 다른데 그 간극을 매우기란 참으로 어렵다. 거렁뱅이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그가 지켜왔을 예술혼은 미술사의 위대한 업적과 잊지 못할 흔적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 생나무 집에 벽과 천장에 가득 그렸을 그 그림을 상상해 봤다.

 

상상 만으로 황홀한, 가슴 벅찬 그 장면을 말이다. 하지만 비루한 내 상상력으론 그것들을 온전히 그려낼 수 없었다. 아니 비현실적이고 오직 경험만으로 탄생할 수 있는 그 광경을 나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비로소 마침표를 찍은 삶의 벼랑에서 그가 온 힘을 쏟아 그려낸 역작일 것이다. 손끝에서 빚어진 또 다른 세계는 우리가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생소하고 또한 어떤 경외심이 들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어느 시대나 존재할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폴 고갱도 예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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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더군다나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몇 점 찾아 봤다.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선과 원근법이 무너진 세계란 것이다. 어떤 그림은 한 덩이 같다는 느낌도 들며, 어우러져있는 색은 참 기기묘묘하다. 하지만 강렬함이 도사리고 있어 쉽게 평을 내릴 수 없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

 

 

조정래, 풀꽃도 꽃이다.

 

 

 

 


0.

  한국 문학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조정래 작가가 이번에는 '한국 교육 현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현실과의 어떤 타협도 없이 냉철하게 사실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국어와 교육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공교육의 무너진 현실을 여실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지금 공교육은 뿌리 깊은 고질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며, 내재적 목적이 결여된 오로지 외재적 목적에만 치우친 기형적인 모습이다. 일명 졸업장 병에 걸려 입시 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위 경쟁이론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교육비는 증가하고, 학습자들의 부담만 가중되는 상태이다. 진정한 행복에 대한 그리고 자아에 대한 탐구도 결여된 채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고만 있다. 더욱 씁쓸한 것은 이제 지위 경쟁도 불가피한 사다리가 걷어차인 사회란 것이다. 그렇다면 콜맨의 보고서의 명시된 내용처럼 '부모의 가정 배경'이 곧 사회적 우위와 계층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비투스적, 문화적, 그리고 학교는 제도적 장치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일종의 장치로 전락한다.


1.

  전인적 교육의 발달, 인성 교육의 강조, 행복한 학습자 현재의 위치 속에서는 너무나 이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몽상이 아니다. 이룰 수 있는 현실이며, 교육자들은 그것들을 현실의 지평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뭐랄까 한가지 '풀꽃도 꽃이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대화가 어쩐지 조금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학생들이 정말 저 말을 사용할까 싶다. 

  그리고 서문에서도 밝혔듯 '강교민'이라는 그 이름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위 생각을 갖고 임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도달한 생각은 '강건한 교육과 민주주의'가 아닐까 싶다.

 

2.

  풀꽃이라는 그 명칭 자체가 수 백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 굉장한 함축과 은유를 함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중들의 고된 삶의 여정이 속속이 닮겨 있다는 그런 느낌.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도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쁜 꽃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엔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 오히려 비참한 그 삶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싶다.

 

위태로움 속에 내재한 아름다움, 역설적이지만 인간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성장해 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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