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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부터 사용할 새 교과서, 학생 참여 중심으로 바뀐다.


 

교육부 보도자료에 의거하여 작성했습니다.

 

2015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1학년 등 일부 학년을 대상으로 개발 돼 이번 3월 전면적으로 보급 되었습니다.

 

앞으로 고등학교 2학년 이후 선택과정 교과서도 개발 돼 보급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새 교과서학습량을 적절하게 줄이고, 실제 배움이 일어나는 학생 활동과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경험을 단계적으로 제시하여 공교육에서 미래사회의 핵심역량*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으며,

 

* 핵심역량 :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이를 통해 과도한 학습 분량, 학생의 흥미참여 유도에 부적합구성, 일상생활과 괴리 제재와 활동 등 현장 전문가들이 우려하던 기존 교과서의 문제점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확실히 15개정 교육과정 해설서만 보더라도, 2009, 2011년에 비해서 거의 반 가까이 줄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경우 한국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양의 학습량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새로운 교과서의 경우 진로지도와 독서를 연관시켜,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고 나아가 진로의 청사진에 명확한 색채를 입힐 수 있는 책을 선정하는 등의 실제적 삶과의 연계적 교육을 강조하기도 한다.

 

 

 

프린팅된 텍스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권장하고 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로 국어 능력자 되기!

(국어) 실제 읽기보다 읽기에 대해’, ‘쓰기보다 쓰기에 대해공부하는 대신, 국어 시간에 책 한 권을 선정하여 읽고, 그 과정에서 친구들과 토의하고, 결과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활동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실질적인 국어 능력을 기르도록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교육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백석, 모닥불과 안도현, 모닥불


 

 

 

모닥불이라고 한다면,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을 내뿜는 것으로 일견 현대의 난방기구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닥불'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당히 서정적으로 만들며, 타오르는 불길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는 묘한 매력을 지니기도 했다.

 

이런 모닥불이란 소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두 개의 시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은 상호텍스트의 입장에서 살피자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늘 초점을 맞출 부분은 '백석'이라는 시인이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매력적이며 준수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백석의 생애를 톺아볼 경우 항상 여성편력과 관련한 사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곤 한다.

 

성북동에 있는, 법정 스님으로 유명한 길상사라는 절의 경우도 백석과 간접적인 영향관계를 맺고 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의 보시로 만들어진 거대한 절이라는 말이 있기에... 하지만 백석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매력은 자신의 가정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군사분계선 일명 삼팔선으로 갈리며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결정되는 순간, 타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납북되게 되는 나름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백석의 시들을 생각해 본다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공동체', '토속' 등등

 

따뜻하고 옛스러운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이다.

또한, 시어들은 방언으로 쓰여 있기에 사실 지금의 독자들에겐 오히려 낯선 외국어쯤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 사용은 백석 나름의 정신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지키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민족의 혼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잃는 다는 것은 한 나라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며, 일제 제국주의의 식민지 기간이 끝나고 난 후에도 반드시 언어가 바로서야 한다는 강렬한 관념이 백석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서는 토속적이고 정감이 가는 소재들과 언어들로 구성 돼 있는 것이다.

 

백석의 경우 대부분 두 가지의 주제 의식으로 굳어진다.

 

1. 공동체의 따스함과 추억

2. 공동체의 해체와 파괴에서 오는 안타까움, 쓸쓸함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쓰려고 한 것이다.

 

조금 더 백석에 관한 지식을 말하자면, 백석도 모더니즘의 경향성을 지닌 작가라 할 수 있다.

 

의아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도시적인 감성을 기초로 하여 기존의 문학 형식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대표자로 '김광균'을 들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의 사용과 객관적 관찰을 통한 묘사가 주로 쓰이며, 천변풍경과 같은 작품에서는 '카메라 아이 기법'이라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속성이라면 백석과 모더니즘의 경향성은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나, 백석은 향토성을 지닌 모더니스트로 분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백석의 모닥불을 감상해 보자.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지금 편의상 행을 구분했지만, 3연 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굉장히 길게 사물들이 나열 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한 연이 한 행이 되고 한 문장이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이라고 한다면, 원형상징의 입장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걔중에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파괴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만, 모닥불 속에 들어가 하나로 얽여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해당 시를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즉, 1연은 농촌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그러한 일상의 것들이 '모닥불'이라는 매개체를 바탕으로 한 대 어우러지는 화합을 일으킴을 알 수 있다. 2연은 이러한 화합의 모닥불 앞에 둘러 앉아 모닥불에 쬐고 있는 여러 사람들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 3연의 경우 모닥불의 속성이 조금 변화를 보이는듯 하다. '모닥불'을 매개로 하여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모닥불로 인해 '뭉둥발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역사'에 대해서 듣게 된다. '뭉둥발이'는 불에 의해서 발가락이 붙어버린 장애를 뜻하는 단어이다.

3연의 모닥불을 통해서는 비극적인 민중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모닥불을 통해 화즌 화합된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를 정리하자면, 조화와 평등의 공동체적 합일 정신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안도현의 '모닥불'을 살펴볼 차례이다.

 

 

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모닥불은 피어오른다'라는 동일한 문장의 반복, 1연의 경우는 '-에서'의 반복, 2연에서는 '-에'의 반복을 통해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복은 운율의 형성뿐만 아니라 의미를 강조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에서'라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특정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즉, 모닥불이 타오르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됨을 알 수 있으며, 2연에서는 '-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을 통해 모닥불이 타오르는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거나 평범한 장소나 시간 속에서 혹은 안정과 나태의 시간 속에서 타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닥불은 한 그루의 '향나무'같이 고고하면서도,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양상을 바탕으로 모닥불이 두 시 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 됨을 알 수 있다.

 

엄밀히 그 긍정적인 속성을 구분하자면,  백석의 모닥불은 조화와 화합의 모닥불이며, 안도현의 모닥불은 희망을 갖게 하는 모닥불이다.

 

 

 

 

 

상호텍스트성


 

공부를 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듣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상호텍스트성'입니다.

 

그렇기에 해당 용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 하겠죠?

 

이에 해당 용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합니다.

 

'상호텍스트성' 간단히 말하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텍스트'라는 것은 상당히 넓은 관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이 향유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대체적으로 이 텍스트란느 개념 안에 포함이 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즉, 이러한 텍스트들간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상호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호텍스트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독자적으로 형성 된 텍스트란 것은 없습니다.

 

특정 작품이나, 글의 경우 개별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텍스트 자체로 인식될 수 있으나, 이는 연속되는 무한한 텍스트의 우주 속에서 연속되는 일부로 파악하셔야 됩니다.

 

종합하자면, 모든 텍스트들은 그 상호관계 속에서 연속적으로 위치해 있으며 개별적이고 독창적으로 보이는 텍스트의 경우도 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텍스트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간텍스트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상호 텍스트성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모든 상호관계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텍스트 사이의 인용, 표절, 복사, 모방, 혼성, 모방, 패러디, 의견 일치, 의미 중첩, 혼합적 의견 강화, 목소리의 배합과 중첩 등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다양한 영향과 수용관계를 비롯하여 거대한 텍스트들의 우주에서 의미론적 상관 관계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상호 텍스트성은 하나의 담화 사이에서의 응답 관계를 시작으로 한 작가의 작품들의 관계와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 사이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장르를 초월한 모든 문학작품과 타 예술 텍스트와의 상호 연관 관계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모든 텍스트는 독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텍스트와 후텍스트 사이에서 영향과 수용의 관계 고리를 형성하면서 의미 작용과 표현 작용을 암암리에 주고받은 결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문학이나, 독서 부분에서 해당 개념이 잘 나타납니다.

 

도종환 시인이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세한도라는 그림을 보고서 '세한도'라는 시를 썼으며,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과 같이 연관관계를 갖는 무한한 텍스트의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외에도 독서에도 상호텍스트성을 강조하여 '주제통합적독서'를 강조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여러 책을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대상과 특정 문제 상황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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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육론] 총체적 언어학습  (7) 2018.04.10

 

 

  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런 구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승리의 세계에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패전의 연속이요 패전의 신기록을 세운 프로계의 또 다른 의미의 금자탑이다.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로고는 슈퍼맨이다. 슈퍼맨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웅일 것이다. 강력한 힘과 하늘을 나는 능력, 눈에서는 초고열의 광선이 발사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말 그대로 슈퍼한 생명체다. 그리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엠블럼역시 이 슈퍼한 슈퍼맨이 배팅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박민규의 첫 작이자 표절 논란에 휩싸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도 읽었으니 그 감상에 대해서 소상히 적고자 한다. 아니다 너무나 단순한 서술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도 복잡한 역설적인 것이다. 감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인간과 인생 말이다. 고찰은 할 수 있지만, 어떤 대답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나는 단순하면서도 소상히 나의 감상을 풀어 놓고자 한다.

  총 3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주인공이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라는 문장을 깨우치기 위한 그 과정을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의 소속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이었던 그는 패전의 기록만을 남긴 치욕적인 경기 내용으로 그리고 그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하나의 소속감으로 묘한 박탈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OB베어스나 MBC청룡과 같은 팀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극명한 패배감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지속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것은 '프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 세상은 '프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프로야구'의 개막과 동시에 모두가 프로가 되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중산층'이란 단어가 소설의 표현대로 파워풀한 단어가 사회의 지층을 변화시켰다. 평범함의 기준이 올라간, 쉬면 안 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해야 하며 무엇인가 되야 하며,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는 그걸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보통의 삶도 아닌 세상, 적어도 '중산층'이란 단어 안에는 들려고 누군가 높여버린 기준에 발 묶여 사는 그런 시대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암기한다. 변하는 지층에 세상은 무섭다는 생각이 겹쳐서였을까? 그는 암기를 통해 일류대에 진학하게 된다. 일류대란 거대한 집단 속 소속이 사람을 바꾼다는 그 한 줄의 문장만을 믿은 채 말이다. 2부에서는 청춘이 그려진다. 그리고 계급에 관한 의식이 그려진다. 결국, 소속 속에서도 계급이란 것이 있고, 그 계급을 올리기 위해 우리는 또, 또! 노력해야 되는 것이다. 삶은 노력의 연속인 것이다. 이제 그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산다. 그의 삶에도 여러 복잡한 것들이 관여하고 끼어들기에 저 자신도 바쁜 것이다. 리포트를 내라면 내고 출석을 부르면 대답하고, 시험을 보라면 보는 삶을 살며, 그는 하루빨리 졸업을 하기 원한다. 그리고 대기업에 취직하게 된다.

  3부의 주인공은 결혼한 남성이자 대기업의 소속된 회사원이다. 다만, 이상하게도 특정 대학의 학연으로 묶인 회사였다. IMF 당시 여러 회사가 무너지고 대량의 인원감축이 들어간 상태였다. 일만을 해왔던 주인공은 결국 이혼을 하고 3차 구조조정 때 실직자가 된다. 그리고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던 그의 친구 '조성훈'이 돌아온다.

​  3부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본질에 대해서 초장에 서술했던 그 위대함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엔 이상하게 뒤틀려 버린 세상 속에 우리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그 삶을 동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 

​  그리고 제시되는 조성훈의 음모론 이 부분은 다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그 의미와 본질을 더욱 강조하며 선명하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로의 세계 속에서 <우승>을 목표로 뛰지 않는 다는 것은 얼마나 괴짜로 보일까? 때론 패배자란 오명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연봉이 얼마지? 어디 소속이지? 집은? 차는? 그래그래 우를 재단할 수 있는 수 많은 척도들이 존재하는 한 프로의 세계만큼은 냉정한 것이다. 과감히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재단 도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  그들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창단한다. 목적은 삼미의 야구를 재현한다는 것,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수양의 목적을 위해서다. 시간이 흘러 당연히 팬클럽은 없어진다. 그리고 각자의 사정과 삶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주인공은 아내와 다시 재혼하게 되며, 조성훈은 야구에서 만난 괴소년과 프라모델 가게를, 다른 인물도 이래저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쓰지 못한 부분이 말하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삼미의 유구한 역사는 하나의 별빛이 되어 가슴 속에 반짝 꺼릴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글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삶은 어떤 구종으로 던질지 모른다. 낙차가 크거나 회전이 많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직구! 잘 모르겠지만, 처야 된다는 강박 속에서 사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삶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지구의 한 점이 아닌 자신만의 지구속 자신만의 세계를 재구축하기 바란다.

 

기능과 전략

 


 

공부를 하다보면, 상당히 헷갈리는 개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능과 전략'이다.

 

두 단어가 사용되는 양상을 살펴볼 경우 어쩐지 그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두 단어의 경계는 한 끗 차이일지 모른다.

 

다음의 정리한 표를 보면 이 둘의 차이가 굉장히 간명해 질 것이다.

 

독서 기능

독서 전략

해독(기본적으로 숙달 돼 있어야 독해가 가능하다.) 해독의 하위적 요소로 음운 인식, 단어 재인, 읽기 유창성이 있다.

바렛은 축어적 이해, 사실적 이해, 추론적 이해, 비판적 이해, 창의적 이해 등을 기능으로 분류하였다.

- 무의식적, 자동화

- 노력을 기하지 않음

- 목표/문제 지향적이지 않음

독자의 의식적 통제 아래 존재하는 능력들을 조합하는 것이자, 특정한 독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일련의 행동이다.

- 독자 중심적 행위

- 의식적인 결정 행위

- 독서 문제에 대한 독자의 반응 결과이다.

- 목표/문제 지향적임

 

일화를 통해서 예시를 들자면, 평소 출근과 퇴근 길에 자가용을 이용해서 하는 철수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철수는 어떠한 의식적인 노력 없이 차를 운전해 자기가 원하는 목적지인 회사와 집에 편안한 상태로 가게 된다.

 

운전을 하는 동안, 철수는 상당한 주의나 인지적인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 상태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문제들을 무리 없이 수행해 나간다.

 

그런데 평소에 자신이 가던 길이 공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때 철수는 머리를 굴려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도로를 타고, 운전을 해야지 집에 도착할 수 있을지, 어떤 길이 가장 효율적이고 빠를지 말이다.

 

그렇다 평소에 길을 운전해 출, 퇴근하는 것은 '기능'에 해당하는 반면, 위와 같은 특정 문제 상황에 닥쳤을 때 인지적 노력을 기울이는 의식적인 그리고 유목적적인 행위 자체가 '전략'에 포함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마다 배당 돼 있는 기능과 전략의 범위는 상이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전략으로 작용해야 하는 것일 수 있으며, 반복적인 노력과 연습을 거친다면, 자동화 되어 전략이 기능으로 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독서라는 문제 상황에 놓일 경우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 일정 수준의 단어를 알고 있는 능력 등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이 갖춰져 있지 않는 상태라면,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상당한 인지적 부하가 일어날 것이다.

 

 

 

 

 

 

 

빙허, 현진권


 

 

  후덕한 인상을 가지신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현진권이다. 그의 글은 하나같이 골수를 쪼개는 칼이 있어,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진권의 '운수 좋은 날'은 각종 패러디를 통해 우리에 익숙하며, 전문을 읽은 사람은 드물지라도, 설렁탕을 사 오는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는 이는 많을 것이다.

  기본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생애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1900년 8월 9일 대구 출생으로 대대로 역관 출신이 많은 집안이었다. 또한, 그의 부친 현경운은 신진 관료로 자식들의 신식 학교 출입과 외국 유학을 허락한 개화 인사다. 그의 모친인 이정효는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고, 15세의 나이에 일찍 결혼하게 된다. 이런 작가의 생애가 반영되어, 어머니의 결핍과 결혼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일부 작품에 반영 되어 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자리까지 오릅니다.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년간 투옥 되게 됩니다.​

  그의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희생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할머니의 죽음',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정신병원장', '고향',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는 미완성 소설입니다.)

  ​현진건의 소설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백조>동인 활동 당시 대표적으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를 들 수 있으며, 식민지 현실을 다루고 있는 '고향', '운수 좋은 날', '신문지와 철장' 그리고 역사소설인 '무영탑', '흑치상지', '선화공주'를 서술한 시기 즉, <백조>활동 당시, 식민지 현실 반영 소설 창작 당시, 역사소설 집필 당시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작품은 가부장적 사회에 관한 폭로와 개화기 지식인의 무력감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 더불어 현진건의 심리가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예술은 예술적 가치만 있으면 물론 훌륭한 예술이다. 그러나 내용적 가치가 문예작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 않을 수 없다.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을 짓는 걸로서 또는 얻는 걸로써 만족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만족치 않는 이도 많은 줄 안다. 물론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이 인생에 필요치 않다는 건 아니다. 인생을 향상시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너무나 미약하다, 희박하다.

예술이 예술되는 소이연은 거기 예술적 표현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로되 그 결정된 예술이 인생에 대하여 중대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그 작품의 내용적 가치, 생활적 가치를 따라서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브센의 근대극, 톨스토이의 작품이 일대의 인심을 진동시킨 이유의 하나는 그 속에 있는 사상의 힘이다. 그 예술만의 힘이 아니다. 예술에만 숨어서 인생을 알라고 하는 작가는 상아탑 속에 숨어서 은피리를 불고 있는 세음이다.

문예는 경국의 대사라고 하지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생활의 제일이요, 예술이 제이다. (현진건 이러쿵 저러쿵)

  ​  현진건은 또한 무조건적인 예술지상주의를 경계하며 내용적 측면, 생활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의 작품 속 할머니, 인력거꾼, 김첨지, 순이, B사감, 유랑 노동자등의 처절하면서 고단한 삶의 단면을 통해 당대 조선의 얼굴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현실을 보며, 현실을 그릴 줄 아는, 현실에 관심을 두고 예술을 접목 시킨 사회파 작가라 볼 수 있다. 민중의 현실을 바라봤다면, 식민지 민중의 가난과 모순, 무기력한 지식인의 행각과 편협한 인심, 주변부적 존재들의 비참한 삶을 극적으로 재현한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문은 실상 인즉 기입니다. 기 없는 글은 아무리 진주 같다해도 곧 사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인께 모파상이나 체홉을 본뜨기 전에 뜌우마나 유우고오를 배우시도록 원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뒤늦은 소원이기도 합니다. (현진건 문장 인터뷰 )

    철학 없는 글, 사상과 생각 없이 오로지 재미를 위한 글은 실상 빈 껍데기와 같을 것입니다. 소비성 세상, 인스턴트 식품이 넘쳐나고, 상품이 되면 뭐든지 공장처럼 찍어내는 세상입니다. 텅 빈 글이 나온다는 것은 지금 사회가 텅 비어있다는 방증입니다.

  현진건은 역사소설도 집필했다. 역사소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설명했는데, 첫째 우연히 심금을 울릴 사실을 발견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례 둘째 작자의 주제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현대에 취재하기가 거북한 점이 있어 그 주제에 적당한 사실을 찾아내어 읽어놓은 사례이다. 현진건은 이 중 두 번째 사례를 ​높게 평가했다.

  많은 걸 느낍니다. 글은 곧 사회라는 그 말이 작가의 책무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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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린다. 그간 뭘 했는지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별다른 삶을 살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영역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으며, 응당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대해 충실했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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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폴 고갱에 관한 내용이다. 그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설가의 입을 빌려 탄생한 작품이다.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에 의존해 그것들을 이어붙이는 작업은 참 고된 작업이란 생각이 든다. 그 작업에는 끈기가 필요하다.

 

끈기란 것은 대상에 대한 애착이 빚어낸 강한 욕구일 것이다. 소설 속 폴 고갱은 참 기이한 인물이며 범인의 눈으론 이해 못할 예술혼을 지닌 존재이다. 그는 달나라의 토끼와 같이 이상의 눈을 지닌 사람에겐 보이지만 현실에 벽 속 즉,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그냥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폴 고갱은 오직 예술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평범하고 안락한 그리고 안정된 삶을 벗어 던져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추구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속물들의 눈 속 아니 속물이라 폄하할 수 없다. 보통의 삶을 살며, 삶 속에 예속된 우리의 눈에는 이해 못할 장면의 연속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고 그 시선 끝에 걸린 세계가 다른데 그 간극을 매우기란 참으로 어렵다. 거렁뱅이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그가 지켜왔을 예술혼은 미술사의 위대한 업적과 잊지 못할 흔적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 생나무 집에 벽과 천장에 가득 그렸을 그 그림을 상상해 봤다.

 

상상 만으로 황홀한, 가슴 벅찬 그 장면을 말이다. 하지만 비루한 내 상상력으론 그것들을 온전히 그려낼 수 없었다. 아니 비현실적이고 오직 경험만으로 탄생할 수 있는 그 광경을 나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비로소 마침표를 찍은 삶의 벼랑에서 그가 온 힘을 쏟아 그려낸 역작일 것이다. 손끝에서 빚어진 또 다른 세계는 우리가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생소하고 또한 어떤 경외심이 들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어느 시대나 존재할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폴 고갱도 예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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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더군다나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몇 점 찾아 봤다.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선과 원근법이 무너진 세계란 것이다. 어떤 그림은 한 덩이 같다는 느낌도 들며, 어우러져있는 색은 참 기기묘묘하다. 하지만 강렬함이 도사리고 있어 쉽게 평을 내릴 수 없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

 

 

조정래, 풀꽃도 꽃이다.

 

 

 

 


0.

  한국 문학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조정래 작가가 이번에는 '한국 교육 현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현실과의 어떤 타협도 없이 냉철하게 사실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국어와 교육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공교육의 무너진 현실을 여실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지금 공교육은 뿌리 깊은 고질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며, 내재적 목적이 결여된 오로지 외재적 목적에만 치우친 기형적인 모습이다. 일명 졸업장 병에 걸려 입시 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위 경쟁이론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교육비는 증가하고, 학습자들의 부담만 가중되는 상태이다. 진정한 행복에 대한 그리고 자아에 대한 탐구도 결여된 채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고만 있다. 더욱 씁쓸한 것은 이제 지위 경쟁도 불가피한 사다리가 걷어차인 사회란 것이다. 그렇다면 콜맨의 보고서의 명시된 내용처럼 '부모의 가정 배경'이 곧 사회적 우위와 계층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비투스적, 문화적, 그리고 학교는 제도적 장치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일종의 장치로 전락한다.


1.

  전인적 교육의 발달, 인성 교육의 강조, 행복한 학습자 현재의 위치 속에서는 너무나 이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몽상이 아니다. 이룰 수 있는 현실이며, 교육자들은 그것들을 현실의 지평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뭐랄까 한가지 '풀꽃도 꽃이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대화가 어쩐지 조금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학생들이 정말 저 말을 사용할까 싶다. 

  그리고 서문에서도 밝혔듯 '강교민'이라는 그 이름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위 생각을 갖고 임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도달한 생각은 '강건한 교육과 민주주의'가 아닐까 싶다.

 

2.

  풀꽃이라는 그 명칭 자체가 수 백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 굉장한 함축과 은유를 함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중들의 고된 삶의 여정이 속속이 닮겨 있다는 그런 느낌.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도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쁜 꽃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엔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 오히려 비참한 그 삶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싶다.

 

위태로움 속에 내재한 아름다움, 역설적이지만 인간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성장해 왔던 것 같다.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이 답답하면서도 내내 숨이 막히는 심정은, 폭력이라는 강압적 수단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억압적인 상황에서 발화 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항시 명분을 찾아 다닌다. 사실상 폭력이란 것 자체에서 우리는 명분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명분이라는 것은 단지, 방패막이로 작용하여 폭력 그 자체에 돌아오는 강한 비난의 화살을 막아주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결과적으로 인간사에 폭력의 씨앗이 멸절되지 않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군대라는 집단의 폐쇄성, 그리고 그러한 폐쇄성이 유지되는 은밀한 작동 방식 중 하나가 바로 폭력일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폭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체적 접촉을 통해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해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자존감이나, 감정에 상처를 입히거나, 무분별한 인신공격 등의 일체의 행위가 이 안에 포함이 되며, 폭력의 범위는 가해자의 주먹에 달린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감정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러한 피해자의 의식 자체가 하나의 무기로 작용하여 약자 프레임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하는 것 자체도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영화의 끝은 굉장히 허무하다. 내내 답답한 그 심정이 마지막 결말 부분에 와서는 가슴에 얹힌 것 처럼 내려앉아 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끝 맺은 것일까, 현실이라는 것은 그러한 답답함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이었을까

 

위 영화를 보니 문득 '창'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군대, 폭력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우악스러운 폭력의 장면들이 손을 떨리게 만든다.

 

폭력의 씨앗의 전염성은 굉장히 강력하다. 인간의 이성이나 자아에 새겨지기 보다는, 인간의 무의식에 강렬하게 새겨져 언제든 폭력이 발동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폭력의 속성이 극악무도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인간사에 걸쳐 우리는 수도 없이 봐 왔으며, 학습해 왔다. 그럼에도 반성하지 않고, 시정하지 못함은 무엇 때문일까 항상 경계해야 한다. 폭력에 몸을 맡기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괴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있다.

 

 

 

난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에게 전염된 폭력의 씨앗이 시퍼렇게 꽃을 핀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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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 문라이트 (Moonlight,2016)  (2) 2018.02.17

 

-바탕이 된 논문이다. 조동일 교수님의 '자아와 세계의 소설적 대결에 관한 시론'이다.  

 


 

  소설이라는 말이 주로 들어가므로 위 논문은 소설에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장르론적 관점에 큰 기여를 한 자아와 세계라는 개념을 토대로 장르에 관해 훑어보기 위해 참고한 것이다.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많이 변화해 왔다. 당연한 것이다. 인식의 차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생각의 추이들이 갈고 닦이면서, 현대의 개념을 완성시키고 여전히 그 의미의 확장과 축소를 더 해가고 있을 것이다.

  소설은 가담항설 도청도설, 도의 전파 수단, 도덕적 진실성, 서양의 novel이나 로만스의 개념, 현대에 이르러 확장되고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개념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둘러싼 환경과 여건 그리고 인식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습과 의미로 변화해 왔다. 이기철학에 단서를 얻어 사람과 만물의 대립의 문제, 자아와 세계의 대립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이 대립의 문제는 기본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작품 내적 자아 : 단순하게 말하자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주인공)

작품 내적 세계 : 인물 혹 주인공을 둘러싼 모든 환경

작품 외적 자아 : 작품을 창작하거나 즐기는 우리

작품 외적 세계 :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또는 세계의 관념

  위 구성품들 무엇을 어떻게 반영했느냐에 따라 자아와 세계의 양상이 달라지며, 여기서 장르가 갈리는 것이다. 상당히 까다로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교술 : ​작품 내적 자아 및 세계에 작품외적 세계가 개입하고 있으며,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 세계 쪽으로 귀착된 자아의 세계화 (자아보다 세계가 우위에 있음.)

서정 :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는 세계의 자아화이며, 주관적이며, 비특정 전환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세계보다 자아가 우위에 있음.)

서사 : 작품 내적 자아 및 세계에 작품 외적 자아가 개입하며, 자아와 세계가 어느 한 쪽으로 귀착되지 않고 대결한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 자체는 특정전환표현이며, 거기에는 작품외적 자아가 개입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불완전 특정전환표현)

희곡 :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없이 전개되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다. 작품 외적 자아가 개입하는 서사는 확정적인 데 비해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없는 희곡은 집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물, 작중시간, 작중 장소의 설정에 제약이 따르고 현재형을 요구한다.

-전환표현에 대해서

​  ​여기서 '전환'이라 함 일상의 것 혹 현실을 예술적으로 변형(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인식과 형상을 갖추어 작품 속에 쓰일 수 있게 그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교술​​은 흔히 수필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인 만큼 현실 그대로를 서술한다. 사물이나 장소를 나열하는 등의 방식을 취하기에 비전환 표현이라 하는 것이다. 즉, 예술적 변형을 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끌어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은 리얼리즘의 측면이 아니다.)

서정​ 갈래에서 비유와 상징이 빠진다면, 공허한 느낌이 들 것이다. 작품의 집약적 장치가 많이 들어가는 만큼, 일상과 현실의 예술적 전환이 확실하다. 또한 예술적 전환을 위해, 자신의 정서 표현을 위해 시적 자아는 어떠한 사물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깐 어떠한 사물에 해당하는 것이 비특정한 것이다.

​서사​와 ​희곡​은 모두 일정한 배경이나, 사건, 인물 등이 설정되어 있다. 이를 특정전환이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서사는 끊임없는 외부세계의 개입이 이루어지기에 불완전한 것이며, 극의 경우 상영과 동시에 작가와 관객의 분리로 완전한이란 표현이 붙게 된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분야인 만큼 참 복잡하다. 역시 복잡한 존재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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