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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의 지향 '김동리'


 

국어과 교육과정을 살펴 보더라도, 항시 '사회 문화적인'  즉, 소통맥락 상에서 '반영론적' 관점 상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일이 정말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데 김동리는 문학이 시대의 거울이 되고,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달랐다.

 

김동리가 지향하는 문학세계 자체가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다루는 내용의 범주 또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이나 운명과 같은 순수한 것들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김동리는 1913~1995년까지 다른 문인들에 비해 꽤나 긴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지나쳐온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면면들이 그의 작품 속에는 녹아들어 있진 않다.

 

응당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라면, 일제의 수탈이나, 광복 후의 혼란상을 담은 작품들을 쓰기 마련이었지만, 김동리만큼은 달랐다.

 

그래서 그가 휘말렸던 논쟁이 바로 '순수 문학 논쟁'이다.

 

총 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 1차

 

당시 20대였던 김동리와 30대였던 유진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비평의 용어로 순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39년의 임화지만 이 말에 역동성을 부연한 것은 유진오다. 논쟁의 중요한 동기를 이룬 대목은 다음의 몇 줄이다.

 

나는 일개 문단인으로서 문학에 있어서의 순수라는 것을 생각하기에 요새보다 더 절실한 때가 없다. 순수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비문학적인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를 두고 말함이다. 문단의 사조가 전면적으로 혼돈 속에서 헤맬 때, 문학인, 지식인의 긍지와 특권을 유지, 옹호해 주는 것은 오직 순수에의 정열이 있을 뿐이다. (순수에의 향 - 특히 신인작가에 관하여)

 

유진오가 이와 같이 신인작가의 (당시 20대였던 김동리는 막 등단한 상황이었다.) 문학정신이 순수하지 못함을 지적했으며, 이런 지적을 통해 촉발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제 2차

 

두 번째 논쟁은 당시 30대 비평가인 김환태가 김동리의 논리에 동조하는 글을 발표하자, 그것을 다시 이원조가 반박한 30대끼리의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제 3차

 

세 번째의 순수문학 논쟁은 김동리와 김동석에 의해서 전개된다. 김동석이 <순수의 정체>라는 글을 통하여 순수문학의 논리적 맹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순수문학과 관련하여 순수함과 비순수함에 관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는 측면에선 상당한 의의를 지니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론자들이 문학의 독자성만을 내세우고 고집함으로써 문학이 당연히 포괄하여야 할 사회적, 역사적 현실이 배제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작게는 문학정신의 왜소화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지나치게 축소화한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논쟁에 말려든 만큼 김동리는 동반자 작가나 카프문학 즉, 특정 목적성을 띤 도식적 문학을 지양했으며, 참여문학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써 지금에까지 김동리는 '순수문학'의 큰 상징성을 갖고 있는 작가이며, 지나친 순수성의 추구가 후대의 평가에 있어 비판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견 김동리의 등단작인 '화랑의 후예'는 그의 거대한 문학관에 빗겨나가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의 심벌'로 대변되는 당대 무기력한 조선인의 모습 그리고 그 전형성을 갖고 관찰의 대상이 되는 '황진사'라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당대 조선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화랑의 후예'는 시대착오적인 발생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저 양반의 지나친 허세에 빠져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인칭 관찰자의 객관적 시점으로, 서술자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설상의 전개를 바탕으로 '조선의 심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숙부는 대종교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하는 등 일제 시대라는 암흑기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며, '황진사'에게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상당히 온정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극단에 서 있는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서도 '황진사'의 여러 일화와 대사와 행동들이 참, 우습거나 눈살을 찌푸르게 만든다.

 

그렇다 김동리의 순수문학의 세계관 속에서 '화랑의 후예'는 예외작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김동리는 황진사의 모습을 통해 전통이 왜곡되게 전달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기 보다는 조선의 전통 자체에 관심을 보이며, 그런 전통이 올바르게 계승 되기를 희구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렬하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전통 계승의 전형적 예시를 보여줌으로, 이러한 잘못된 사례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법으로 전통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이 외에 작품들 대표적으로 '등신불, 바위, 역마, 까치소리' 기구한 삶의 역정이나, 운명론적 세계관 등 인간 본연의 모습과 그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바위의 경우는 문등병에 걸린 여자의 기구한 삶의 모습, 역마의 경우는 역마살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정주, 귀촉도와 김소월, 접동새, 한국 문학의 전통적 특질의 계승


 

'문학'이라는 것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일견 두 단어가 사실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역설적 단어의 조합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한 이항대립의 관계로 이 둘의 관계를 바라보면 문학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선이 발생할 수 있기에 주의해아 한다.

 

문학에는 세계 공통적으로 그 안을 관통하는 보편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가령 문학의 소재로 삼는 것들의 보편적 특성, 언어로 형상화 되어 작가가 전달학고자 하는 특정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 등이 보편성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특수성이라 한다면, 사회 문화적인 맥락을 바탕으로 형성된 고유한 문화가 일궈낸 것들로 한국 문학의 경우는 '은근과 끈기', '자연친화적 사고', '웃음으로 눈물 닦기', '풍자와 해학', '이별의 정한', '한의 정서'등의 있을 것이다.

 

이중 오늘 다룰 두 시 '서정주의 귀촉도'와 '김소월의 접동새'는 '한의 정서'라는 한국문학의 고유한 문학적 특질을 계승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이라는 단어는 설명하기 굉장히 난해하고 힘든 단어이다. 단순하니 슬픔이나 좌절이 아닌, 피가 맺힐 듯한 단장의 슬픔과 그런 구구절절한 것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뭉쳐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으 설명하긴 했지만, 한의 전부를 설명한 것은 또 아니다.

 

 

대체적으로 문학적 전통적 계승의 그 계보를 그리자면 현대시 작가로는 김소월과 박제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이 대표적으로 한국 문학의 전통적인 소재들을 차용하여 시들을 만들어 냈으며, 문학적 특질을 잘 계승했다 하지만, 이 둘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고유한 한국 문학의 특질이 도출될 수 있다.

 

 

오늘 살펴보고자하는 시 두 시는 사실상 같은 제목을 같고 있다.

 

귀촉도 = 접동새를 뜻한다.

 

이는 두 시 다 접동새 설화라는 전통적인 설화를 차용하였으며, 그 설화 자체에 이미 한의 정서가 내재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시가 한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서정주,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밝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먼저, '은장도'라는 시어를 바탕으로 화자가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은장도라는 것은 여성의 정절을 지키는 수절의 도구로 사용 됐기에, 그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서역 삼만 리, 파촉 삼만 리 :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거리를 가시화하고 있으며, 그 거리가 좁힐 수 없는 즉, 임의 죽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거리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슬픔과 외로움은 '육날 메투리'라 하여, 자신의 머리로 엮은 신발을 통해 형상화 되고 있으며,

 

마지막 연의 귀촉도를 통해 감정 이입으로 한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주제를 도출하자면, '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회한'정도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바이 깊으면

이 산 저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사실상 김소월의 시가 접동새 설화에 더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해당 시의 내용이 바로 접동새 설화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접동새 설화

 

옛날 평북 진두강 가에 10남매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를 들였다. 흉악하고 포악한 계모는 전처의 자식들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죽은 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모두 없애고 그 자식들에게는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급기야는 외출도 금지시켰다.

소녀가 나이가 차서 박천의 어느 도령과 혼약을 맺고, 부잣집인 약혼자 집에서는 소녀에게 많은 예물을 주었는데,

이를 시기한 계모가 어느 날 그 예물을 빼앗고 소녀를 그 친어머니의 장롱 속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우자

그 재속에서 한 마리 접동새가 날아 올랐다.

누나의 죽음에 아홉 동생들이 슬퍼하면서 누나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는 아까워하며 태우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관가에서는 계모를 잡아 그 딸이 죽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형을 시켰는데, 계모의 재 속에서는 까마귀가 나왔다고 한다. 접동새가 된 처녀는 밤이면 동생들을 찾아와 울었는데,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까닭은 계모가 둔갑한 까마귀가 무서워서라고 한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김동인, 감자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경우 외국의 문학 사조를 수용하여 국내에 적용한 것이다.

사조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새로운 문학적 움직임으로, 그러한 움직임들의 수사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특정 유파를 형성하게 된다.

 

즉, 사실주의라는 명칭이나 자연주의라는 명칭에는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성이 내포해 있다는 뜻이다.

대게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는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조에 대한 반발이나, 사조들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반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작가들이 여러 외국 문학 사조들을 받여 들이지만, 외국의 상황과 국내의 상황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외국의 경우 100년을 기점으로 사조의 변화를 보이기에 꽤나 오랜 기간동안 해당 사조가 적립 되고 창작 되어지기 때문에 그 경계나 정체성 자체가 명확하다.

 

반면 국내의 경우는 10년을 주기로 하여 사조가 급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명확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전 다소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조에 흡수 되거나 혼재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실상 사실주의의 큰 틀 안에 자연주의가 포함 되기도 한다.

 

사실주의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존의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낭만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움직임으로 사실주의가 주창 되었으며, 낭만주의적인 색채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라는 명칭 보다는 사실 '리얼이즘'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현실의 문제나 현실의 상황을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그려내고자 노력했던 학파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 문학은 개인의 삶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한 개인의 삶이 사회에 의해 규명 되고 조건지워지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사회 역사적 관계를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인식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실주의의 경우 기존의 계몽주의적 성향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으며, 문학 자체의 순수성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계몽주의라는 것은 꿈에서 깨게 한다는 것으로, 이성의 빛으로 사람들의 무지몽매함을 쫓아낸다는 의미이다. 즉, 문명 개화나 근대적인 교육을 바탕으로 무지한 민중들을 깨우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교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교훈성으로 인한 교술적인 성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데, 그 대표자가 바로 이광수이다.)

 

자연주의

 

국내 문학에서는 사실주의와의 경계를 구분짓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주의를 계승, 강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의 경우 다윈의 진화론의 관점을 수용한 것입니다.

 

즉, 유전적 요인과 환경 결정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의 위압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국내 문학의 경우 자연주의의 대표자는 바로 '김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보시게 될 김동인의 '감자'와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죠.

 

자연주의의 경우 에밀 졸라에 의해서 처음 시행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주의를 졸라이즘이라고도 합니다.)

 

 

 

김동인, 감자

 

대략적인 이야기들을 숙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주요한 인물은 '복녀'입니다.

 

복녀라는 인물이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는 그 과정을 지켜 보면서, '자연주의'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대략적으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사농공상 중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꽤나 기품있는 예절에 대해 익힌 '복녀'였지만, 게으른 남편과 살게 되고 칠성촌 밖 빈민굴에서 생활하게 되변서 점점 타락해 갑니다.

 

결과적으로는 몸을 파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며, 왕서방과의 다툼을 통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복녀의 죽음 이후에도 굉장히 비정한 장면은 이어집니다. 복녀의 시체를 두고 돈과 돈이 오고 가며, 복녀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복녀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칠성촌 밖 빈민굴이라는 자연적인, 환경적인 요건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즉, 몸을 파는 행위 온갖 범죄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행위가 보편화된 환경이었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 지속적으로 노출 될 경우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또한 '복녀'라는 이름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전영택의 화수분과도 엮일 수 있는 것으로 이름 자체에서 오는 반어, '언어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동인에 대해서 짚고 넘아가자면, 김동인은 한국 문단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이광수를 넘어서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굉장한 경쟁심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살아온 환경 자체가 유복했지만, 중반부부터 병세가 짙어지고, 집안이 몰락하며 고생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김동인의 경우는 '인형 조종술'이나, '일원묘사법'으로 유명합니다.

 

'인형 조종술'의 경우 김동인이 말한 일종의 창작방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이나 행동들을 인형을 조종 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술가는 마치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작품을 창조하고, 그렇게 창조한 세계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동인은 인형 조종술을 얘기하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 언급 합니다. 세간의 평은 '도스토옙스키'가 더 좋지만, 김동인의 창작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톨스토이'가 더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는 자기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소설 속 세계에 오히려 이끌려 간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굉장히 난해하면서도,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 설명이긴 합니다.

 

'일원묘사법'

 

1) 일원묘사체 A형식

2) 일원묘사체 B형식

3) 다원묘사체

4) 순객관묘사체

 

김동인이란 인물이 대단한 것은 당대 시점이란 개념이 없었던 시절임에도 홀로 시점의 개념을 익히고 적립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어체의 사용을 도입하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등의 움직임을 통해 큰 족적을 남기게 된 인물이죠.

 

그 중 '일원묘사법'은 '시점'과 관련 있는 내용입니다.

 

1) 일원묘사체 A형식 : 주요 인물의 눈에 비친 내용만을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즉, 작가가 선정한 1인칭, 3인칭의 특정 인물의 시선에만 국한하여 서술해 나가는 방식이죠.

 

2) 일원묘사체 B형식 : 작품이란 커다란 덩어리를 쪼개어 각각의 덩이마다 다른 인물의 시점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에 한 부분씩 주요 인물로 바꾸어가며 쓰는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다원묘사체 : 이는 특정 부분을 끊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든 상관 없이 작품 속 어떤 인물이든 묘사가 가능한 즉 전지적 작가 시점과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순객관묘사체 : 작가가 중립적인 위치에 서 행동만을 묘사하는 지금의 작가 관찰자 시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형기 폭포, 김수영 폭포


 

오늘은 동일한 제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두 편의 시를 보겠습니다.

 

역시나 동일한 제재 혹은 소재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시의 경우 당연히 상호텍스트적인 관점 속에서 묶일 수 있겠죠.

 

그렇다면 먼저 이형기의 폭포를 보겠습니다.

 

폭포 -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특이한 점은 전면에 나오는 목소리가 바로 '폭포'라는 것입니다. '그대'라는 청자를 상정하여 계속하여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대략적으로 폭포의 그 형상을 비유적 표현을 바탕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상화의 방식을 하나하나 드려다보게 된다면,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선명한 언어들을 바탕으로 한 편의 시가 직조 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자욱'이라든가, '박살나는' 등의 표현을 통해서 강력한 생명력을 형상화 시킨다기 보다는, 폭포 그 자체의 비극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폭포'라고 불리는 대상의 숙명적 고통이자, 실존적인 고통인 것이죠. 결과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슬픔과 비극을 폭포를 통해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폭포라는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겪어야 하는 실존적인 고통의 모습, 인간이기 때문에 거쳐야 하고, 겪어야 하는 수 많은 고통을 폭포와의 유사성 속에서 풀어나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김수영의 폭포의 경우 '폭포'라는 대상 자체는 예찬의 대상이자, 지향하는 존재입니다. 즉, 닮고싶은 존재인 것이죠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해당 시에서 폭포라는 존재는 '무서운 기색도'없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는 고매한 정신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폭포라는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구라고 한다면 다음 부분일 것이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 곧은 소리는 곧은 /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성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강렬하게 내리 꽂히는 폭포의 생명력과 맞 닿으며, 살아 있는 정신, 곧은 정신 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나타와 안정'과 같이 현재에 만족하여 정적으로 멈춘 삶의 모습을 추구하기 보다는, 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인하면 떠오르는 시는 '눈'이나 '풀'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자연의 속성을 바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는 방식을 많이 취했으며, 정적이기 보다는 동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끊임 없는 운동감을 보여주는 시인이기도 하다.

 

김수영 시인도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빠져들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과정은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를 바탕으로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그렇다 김수영이란 시인은 현실에 참여하며, 강렬한 운동성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중략) 그러면 온몸으로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중에서

 

 

동일한 제재를 바탕으로 시를 쓴다고 하여도, 작가의 의식과 관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주제 의식을 형상화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우치전, 허균의 홍길동전


 

 

 

아무래도 전우치의 평균적인 이미지와 대중성을 올려 놓은 것은 바로 이 전우치라는 영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전우치를 배우인 강동원이 연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미지 자체가 긍정적으로 형성될 것이다.

 

이에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전우치의 이미지는 자유로우며, 장난기 많은 그리고 신이한 도술을 부리는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오늘 살펴 볼 전우치전의 경우도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전우치 설화'이다.

 

설화의 원형적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여러 삽화를 삽입하고, 병렬 나열하는 방식의 '삽화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사실 공부를 하다보면, 삽화식 구성의 개념과 액자식 구성의 개념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러한 모호성에 기인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구성'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붙어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구성 다른 말로 바꾸자면 '플롯'이 여기에 해당한다. 플롯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견 스토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E. M. 포스터는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스토리는 시간적 순서대로 배열된 사건의 서술이다.

플롯도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 관계에 중점을 둔다.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하는 것은 스토리이지만,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하는 것은 플롯이다. 시간적 순서는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인과 관계가 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가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다면, 이것은 신비를 간직한 플롯이며, 고도의 발전이 가능한 형식이다.

플롯은 소설의 논리적이고 지적인 단면이다.

 

플롯은 일종의 설계도 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대한 하나의 직조물 혹은 건축물인 소설을 건설해 내기 위해, 그 내부 구조부터 외형에 이르기까지 단단하게 설계해 나갈 때 그것들의 짜임새를 플롯이라 하는 것이죠.

 

플롯의 간단한 개념에 대해 살폈으니, '삽화적 구성'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삽화'라는 것은 책을 읽다 보시면, 중간 중간에 끼어 있는 그림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사건들이 서로 밀접한 관련성 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산만하게 연결된 직선적 구성의 한 방식입니다.

 

반면 액자식 구성은 외화와 내화로 구성 돼 있으며, 외화와 내화과 유기적인 연관관계 속에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고전 소설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환몽구조'를 갖고 있기에 각몽과 입몽의 단계를 바탕으로 액자식 구성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화에서 겪은 핵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그 과정을 서술하는 몽자류 혹은 몽유록계 소설들이 즐비하기에, 삽화적 구성과의 차이는 상당히 명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우치전'의 경우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커다란 '전우치'와 관련한 일대기적 서사라는 보편적인 서사가 관통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작은 삽화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일례로 도적을 소탕하는 삽화(엄준 토벌 삽화), 역모 누명 삽화 등의 삽화들이 배열이 돼 있으며, 이들의 사건들은 모두 '전우치'의 신이한 도술과 능력을 통해 독자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전우치전에서 조력자의 역할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특정 인물의 조력을 바탕으로 도술을 익히고 나아가, 조력자의 도움을 통해 대업을 이루는 방식이 영웅의 서사적 일대기의 한 양상임에도, 전우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이한 능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전기성'의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의 입장을 통해 허균의 홍길동전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저는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바로 인물의 도덕성 측면입니다.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은 굉장히 많습니다. 대체로 결연담이나, 혼사장애담과 같은 화소에서 신분적 제약과 개인적 사랑의 욕구가 부딪치며, 좌절하거나 이를 초월하고 극복해 사랑을 이루는 방식이 많죠.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전우치라는 인물이 자신의 도술로써 탐관오리를 벌하고 빈민을 구제하며 도적을 물리치는 등의 영웅적 면모를 보이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하는 등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도 도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습의 영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점이 바로 홍길동전과 만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홍길동도 활빈당을 구성해 의로운 일을 해 나가지만, 마지막 부분에 율도국을 정복하는 과장을 보시면 상당히 비윤리적이란 인상이 강합니다.

 

율도국의 경우 왕이 폭정을 일으켜 백성들이 힘든 시절도 아니었으며, 굉장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임에도 홍길동은 자신의 힘으로 율도국의 왕위에 오른다는 측면이 조금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개인적인 욕망과 윤리성이 부딪치는 측면으로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윤리성을 억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완벽한 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영웅이란 부분이 전우치전과 홍길동전의 공통점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에 입각해 묶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석, 모닥불과 안도현, 모닥불


 

 

 

모닥불이라고 한다면,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을 내뿜는 것으로 일견 현대의 난방기구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닥불'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당히 서정적으로 만들며, 타오르는 불길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는 묘한 매력을 지니기도 했다.

 

이런 모닥불이란 소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두 개의 시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은 상호텍스트의 입장에서 살피자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늘 초점을 맞출 부분은 '백석'이라는 시인이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매력적이며 준수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백석의 생애를 톺아볼 경우 항상 여성편력과 관련한 사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곤 한다.

 

성북동에 있는, 법정 스님으로 유명한 길상사라는 절의 경우도 백석과 간접적인 영향관계를 맺고 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의 보시로 만들어진 거대한 절이라는 말이 있기에... 하지만 백석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매력은 자신의 가정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군사분계선 일명 삼팔선으로 갈리며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결정되는 순간, 타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납북되게 되는 나름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백석의 시들을 생각해 본다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공동체', '토속' 등등

 

따뜻하고 옛스러운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이다.

또한, 시어들은 방언으로 쓰여 있기에 사실 지금의 독자들에겐 오히려 낯선 외국어쯤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 사용은 백석 나름의 정신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지키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민족의 혼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잃는 다는 것은 한 나라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며, 일제 제국주의의 식민지 기간이 끝나고 난 후에도 반드시 언어가 바로서야 한다는 강렬한 관념이 백석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서는 토속적이고 정감이 가는 소재들과 언어들로 구성 돼 있는 것이다.

 

백석의 경우 대부분 두 가지의 주제 의식으로 굳어진다.

 

1. 공동체의 따스함과 추억

2. 공동체의 해체와 파괴에서 오는 안타까움, 쓸쓸함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쓰려고 한 것이다.

 

조금 더 백석에 관한 지식을 말하자면, 백석도 모더니즘의 경향성을 지닌 작가라 할 수 있다.

 

의아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도시적인 감성을 기초로 하여 기존의 문학 형식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대표자로 '김광균'을 들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의 사용과 객관적 관찰을 통한 묘사가 주로 쓰이며, 천변풍경과 같은 작품에서는 '카메라 아이 기법'이라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속성이라면 백석과 모더니즘의 경향성은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나, 백석은 향토성을 지닌 모더니스트로 분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백석의 모닥불을 감상해 보자.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지금 편의상 행을 구분했지만, 3연 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굉장히 길게 사물들이 나열 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한 연이 한 행이 되고 한 문장이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이라고 한다면, 원형상징의 입장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걔중에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파괴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만, 모닥불 속에 들어가 하나로 얽여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해당 시를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즉, 1연은 농촌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그러한 일상의 것들이 '모닥불'이라는 매개체를 바탕으로 한 대 어우러지는 화합을 일으킴을 알 수 있다. 2연은 이러한 화합의 모닥불 앞에 둘러 앉아 모닥불에 쬐고 있는 여러 사람들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 3연의 경우 모닥불의 속성이 조금 변화를 보이는듯 하다. '모닥불'을 매개로 하여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모닥불로 인해 '뭉둥발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역사'에 대해서 듣게 된다. '뭉둥발이'는 불에 의해서 발가락이 붙어버린 장애를 뜻하는 단어이다.

3연의 모닥불을 통해서는 비극적인 민중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모닥불을 통해 화즌 화합된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를 정리하자면, 조화와 평등의 공동체적 합일 정신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안도현의 '모닥불'을 살펴볼 차례이다.

 

 

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모닥불은 피어오른다'라는 동일한 문장의 반복, 1연의 경우는 '-에서'의 반복, 2연에서는 '-에'의 반복을 통해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복은 운율의 형성뿐만 아니라 의미를 강조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에서'라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특정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즉, 모닥불이 타오르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됨을 알 수 있으며, 2연에서는 '-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을 통해 모닥불이 타오르는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거나 평범한 장소나 시간 속에서 혹은 안정과 나태의 시간 속에서 타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닥불은 한 그루의 '향나무'같이 고고하면서도,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양상을 바탕으로 모닥불이 두 시 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 됨을 알 수 있다.

 

엄밀히 그 긍정적인 속성을 구분하자면,  백석의 모닥불은 조화와 화합의 모닥불이며, 안도현의 모닥불은 희망을 갖게 하는 모닥불이다.

 

 

 

 

 

빙허, 현진권


 

 

  후덕한 인상을 가지신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현진권이다. 그의 글은 하나같이 골수를 쪼개는 칼이 있어,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진권의 '운수 좋은 날'은 각종 패러디를 통해 우리에 익숙하며, 전문을 읽은 사람은 드물지라도, 설렁탕을 사 오는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는 이는 많을 것이다.

  기본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생애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1900년 8월 9일 대구 출생으로 대대로 역관 출신이 많은 집안이었다. 또한, 그의 부친 현경운은 신진 관료로 자식들의 신식 학교 출입과 외국 유학을 허락한 개화 인사다. 그의 모친인 이정효는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고, 15세의 나이에 일찍 결혼하게 된다. 이런 작가의 생애가 반영되어, 어머니의 결핍과 결혼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일부 작품에 반영 되어 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자리까지 오릅니다.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년간 투옥 되게 됩니다.​

  그의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희생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할머니의 죽음',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정신병원장', '고향',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는 미완성 소설입니다.)

  ​현진건의 소설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백조>동인 활동 당시 대표적으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를 들 수 있으며, 식민지 현실을 다루고 있는 '고향', '운수 좋은 날', '신문지와 철장' 그리고 역사소설인 '무영탑', '흑치상지', '선화공주'를 서술한 시기 즉, <백조>활동 당시, 식민지 현실 반영 소설 창작 당시, 역사소설 집필 당시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작품은 가부장적 사회에 관한 폭로와 개화기 지식인의 무력감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 더불어 현진건의 심리가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예술은 예술적 가치만 있으면 물론 훌륭한 예술이다. 그러나 내용적 가치가 문예작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 않을 수 없다.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을 짓는 걸로서 또는 얻는 걸로써 만족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만족치 않는 이도 많은 줄 안다. 물론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이 인생에 필요치 않다는 건 아니다. 인생을 향상시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너무나 미약하다, 희박하다.

예술이 예술되는 소이연은 거기 예술적 표현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로되 그 결정된 예술이 인생에 대하여 중대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그 작품의 내용적 가치, 생활적 가치를 따라서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브센의 근대극, 톨스토이의 작품이 일대의 인심을 진동시킨 이유의 하나는 그 속에 있는 사상의 힘이다. 그 예술만의 힘이 아니다. 예술에만 숨어서 인생을 알라고 하는 작가는 상아탑 속에 숨어서 은피리를 불고 있는 세음이다.

문예는 경국의 대사라고 하지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생활의 제일이요, 예술이 제이다. (현진건 이러쿵 저러쿵)

  ​  현진건은 또한 무조건적인 예술지상주의를 경계하며 내용적 측면, 생활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의 작품 속 할머니, 인력거꾼, 김첨지, 순이, B사감, 유랑 노동자등의 처절하면서 고단한 삶의 단면을 통해 당대 조선의 얼굴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현실을 보며, 현실을 그릴 줄 아는, 현실에 관심을 두고 예술을 접목 시킨 사회파 작가라 볼 수 있다. 민중의 현실을 바라봤다면, 식민지 민중의 가난과 모순, 무기력한 지식인의 행각과 편협한 인심, 주변부적 존재들의 비참한 삶을 극적으로 재현한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문은 실상 인즉 기입니다. 기 없는 글은 아무리 진주 같다해도 곧 사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인께 모파상이나 체홉을 본뜨기 전에 뜌우마나 유우고오를 배우시도록 원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뒤늦은 소원이기도 합니다. (현진건 문장 인터뷰 )

    철학 없는 글, 사상과 생각 없이 오로지 재미를 위한 글은 실상 빈 껍데기와 같을 것입니다. 소비성 세상, 인스턴트 식품이 넘쳐나고, 상품이 되면 뭐든지 공장처럼 찍어내는 세상입니다. 텅 빈 글이 나온다는 것은 지금 사회가 텅 비어있다는 방증입니다.

  현진건은 역사소설도 집필했다. 역사소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설명했는데, 첫째 우연히 심금을 울릴 사실을 발견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례 둘째 작자의 주제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현대에 취재하기가 거북한 점이 있어 그 주제에 적당한 사실을 찾아내어 읽어놓은 사례이다. 현진건은 이 중 두 번째 사례를 ​높게 평가했다.

  많은 걸 느낍니다. 글은 곧 사회라는 그 말이 작가의 책무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바탕이 된 논문이다. 조동일 교수님의 '자아와 세계의 소설적 대결에 관한 시론'이다.  

 


 

  소설이라는 말이 주로 들어가므로 위 논문은 소설에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장르론적 관점에 큰 기여를 한 자아와 세계라는 개념을 토대로 장르에 관해 훑어보기 위해 참고한 것이다.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많이 변화해 왔다. 당연한 것이다. 인식의 차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생각의 추이들이 갈고 닦이면서, 현대의 개념을 완성시키고 여전히 그 의미의 확장과 축소를 더 해가고 있을 것이다.

  소설은 가담항설 도청도설, 도의 전파 수단, 도덕적 진실성, 서양의 novel이나 로만스의 개념, 현대에 이르러 확장되고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개념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둘러싼 환경과 여건 그리고 인식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습과 의미로 변화해 왔다. 이기철학에 단서를 얻어 사람과 만물의 대립의 문제, 자아와 세계의 대립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이 대립의 문제는 기본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작품 내적 자아 : 단순하게 말하자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주인공)

작품 내적 세계 : 인물 혹 주인공을 둘러싼 모든 환경

작품 외적 자아 : 작품을 창작하거나 즐기는 우리

작품 외적 세계 :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또는 세계의 관념

  위 구성품들 무엇을 어떻게 반영했느냐에 따라 자아와 세계의 양상이 달라지며, 여기서 장르가 갈리는 것이다. 상당히 까다로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교술 : ​작품 내적 자아 및 세계에 작품외적 세계가 개입하고 있으며,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 세계 쪽으로 귀착된 자아의 세계화 (자아보다 세계가 우위에 있음.)

서정 :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는 세계의 자아화이며, 주관적이며, 비특정 전환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세계보다 자아가 우위에 있음.)

서사 : 작품 내적 자아 및 세계에 작품 외적 자아가 개입하며, 자아와 세계가 어느 한 쪽으로 귀착되지 않고 대결한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 자체는 특정전환표현이며, 거기에는 작품외적 자아가 개입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불완전 특정전환표현)

희곡 :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없이 전개되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다. 작품 외적 자아가 개입하는 서사는 확정적인 데 비해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없는 희곡은 집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물, 작중시간, 작중 장소의 설정에 제약이 따르고 현재형을 요구한다.

-전환표현에 대해서

​  ​여기서 '전환'이라 함 일상의 것 혹 현실을 예술적으로 변형(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인식과 형상을 갖추어 작품 속에 쓰일 수 있게 그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교술​​은 흔히 수필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인 만큼 현실 그대로를 서술한다. 사물이나 장소를 나열하는 등의 방식을 취하기에 비전환 표현이라 하는 것이다. 즉, 예술적 변형을 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끌어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은 리얼리즘의 측면이 아니다.)

서정​ 갈래에서 비유와 상징이 빠진다면, 공허한 느낌이 들 것이다. 작품의 집약적 장치가 많이 들어가는 만큼, 일상과 현실의 예술적 전환이 확실하다. 또한 예술적 전환을 위해, 자신의 정서 표현을 위해 시적 자아는 어떠한 사물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깐 어떠한 사물에 해당하는 것이 비특정한 것이다.

​서사​와 ​희곡​은 모두 일정한 배경이나, 사건, 인물 등이 설정되어 있다. 이를 특정전환이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서사는 끊임없는 외부세계의 개입이 이루어지기에 불완전한 것이며, 극의 경우 상영과 동시에 작가와 관객의 분리로 완전한이란 표현이 붙게 된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분야인 만큼 참 복잡하다. 역시 복잡한 존재인 것 같다. ​

 

 

신화, 전설, 민담에 관하여 


 

고전 문학의 커다란 범주 중 하나이자,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한 설화에 대해서 교육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지금 대중을 통해 널리 읽히고 있는 많은 소설들의 경우 그 염원이나, 뿌리를 더듬어 본다면 당연 설화로부터 파생 돼 조금씩 그 모습이 바뀐 것일 것이다.

조동일 선생님이 견지하신 생극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문학 기저에는 항시 설화적 본질이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에 입각하자면, 설화라는 것 그리고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있는 개별적인 작품들은 진공 상태에 놓여 작가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발달한 것들이 아니다. 상호작용에 의해 이것들이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조금씩 무한한 텍스트의 우주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된 창조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과거를 더듬는 것은 고리타분한 발상의 일부가 아닌, 그 뿌리를 찾으며 우리 문학의 본질을 선명하게 더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탐구의 과정은 문학 전반의 문화적 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학습자들로 하여금 인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성과 필요성에대한 인식이 일차적으로 갖춰진다면, 학습자들의 정의적 요소를 자극하여 '동기'를 이끌 수 있다. 동기는 학습을 시작하게 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이 설화는 무엇에서 시작된 것일까?

 

-자연신화학파(自然神話學派)

-인류학파(人類學派)

-심리학파(心理學派)

-제의학파(祭儀學派)

 

설화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 되었는가?

-인구기원설(印歐起源說)

-인도기원설(印度起源說)

-역시지리학파(歷史地理學派)

  설화의 분류에 관해서는 삼분법적 관점이 일반적일 것이다. 즉, 신화, 전설, 민담으로 구분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외에도 귀납적 방법에 의해, 주체와 상황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방법들도 존재한다.

구분

신화

전설

민담

전승자의 태도

신화적 질서의 일부라는 인식

진실성을 중시

흥미와 교훈 위주

시간과 장소

태초와 창세

구체적인 시, 공간

뚜렷한 시, 공간이 없음

증거물

포괄적

자연물이나 사물 등 특정적이고 개별적 사물

평범한 인간

결구의 특징

숭고적, 종교적

비극적, 운명론적

희극적, 낙천적

자아와 세계의 관계

상호보완적 (동질성)

세계의 우위에 따른 자아의 좌절

자아의 우위

초점

질서

세계의 경이

자아의 가능성

 

신화 : 자아와 세계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대결한다. 신화에서 인간과 모든 생물, 자연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일관된 질서 속에 있으며, 이 질서는 항구적인 것이다. 이 질서를 신화적 질서라고 부른다.

전설 : 대결의 과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작품외적 자아는 작품내적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취한다. 존중해야 할 것은 오직 작품외적 자아 자신의 논리이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는 실감이 부족하지만, 특정한 증거물이 존재하여 부족한 것을 실감 나게 하는 구실을 한다. 또한,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 있어 세계가 우위에 서게 되며, 이에 따른 작품내적 자아의 주체성을 관철시키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세계의 횡포에 대한 경이)

 

민담 : 작품외적 세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빌리지 않고 가공적으로 설정된다. 상대적으로 (신화와 전설) 작품내적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한층 더 치열하게 전개함으로써 작품내적 자아나 작품내적 세계 쌍방이 다 납득할 수 있는 구체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다. 또한, 자아가 우위에 입각하여, 전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낙관적 사고 방식이 그리고 경직된 윤리 관념의 파괴를 통해 웃음을 얻어낼 수 있다.

 

기본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 자체가 조동일 선생님의 '자아와 세계'라는 개념이다.

 

자아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작품 내에 존재하는 중심적인 행적을 보이는 존재라고 보면 된다. 쉽게 말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세계는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총체적인 것들, 즉 작품 속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주인공과 갈등을 일으키는 반동인물, 사건일 펼쳐지는 시간이나 공간적인 개념들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목적하고 의도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표점에 갈 수 있게 만드는 수 많은 계단들을 뜻하는 것이다.

 

 

대화 중심 문학 수업


 

15개정 교육과정의 '교수·학습 방법 및 유의 사항'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항상 언급 되는 것이 '대화'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게 운영하자는 점이다.

 

'대화',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정말 많이 나누는 것이며,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사실상 의사소통의 양상에 따라 대화의 모습도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대화 중심 문학 수업'에서는 다양한 대화의 양상들이 반영되어 있다.

 

일차적으로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아닌 학습자의 능동성을 재고하는 학습자 중심의 수업임을 알 수 있다.

 

고무적인 것이 '대화 중심 문학 수업'은 오로지 '문학 수업'만을 위한 모형이며, 문학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허용과 더불어 사고력을 배양함에 있어 탁월한 효과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현대의 교육적 기조는 이처럼 일방적인 지식의 주입 보다는 대화와 상생을 바탕으로 스스로 구성해 나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에서 살펴 봤던 '작문 워크숍, 현시적 교수법'과 같이 역시나 지식을 이해하고 간략하게 설명하는 단계가 따로 할당 돼 있다.

'문학에 관한 지식 이해하기' 부분에서는 학습 목표에 대한 설명과 그 중요성, 필요성을 부각하며 해당 목표와 관련하여 필요한 지식들을 간략하게 제시해 준다.

 

기본적으로 수업에 있어 전반적인 틀을 닦아줘 올바른 경로를 잡아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위긴스와 맥타이의 경우 '쌍둥의 죄악'이라고 하여 두 가지 수업을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무런 소득이 없이 발과 손만 바쁘게 움직이는 활동 중심의 수업이다.

 

이러한 활동 중심 수업의 맹점을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최소한도의 지식과 방향성을 교사의 재량을 바탕으로 잡아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단순히 활동이 아닌 해당 문학 작품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사는 적절하게 길을 안내하고 조력해야 한다.

 

학습자 중심의 수업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교사는 손을 놓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위치에서 굉장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설정이 이루어졌다면, 작품을 읽거나 시를 낭송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중요하다.

 

대화 중심 문학 수업에서는 총 3가지 종류의 대화가 존재한다.

 

1) 개인의 내적 대화

2) 독자와 독자들 간의 대화 이를 혹 수평적 대화, 횡적 대화라고 한다. 학생과 학생의 관계성과 위치를 고려하여 이와 같은 명칭이 붙은 것이다.

3) 교사(전문가)와 독자의 대화이다. 이 부분은 수직적 대화, 종적 대화라고 한다. 역시나 관계성과 위치를 고려한 명칭이다.

 

개인의 내적 대화는 '비고츠키의 언어'에 대한 관점을 생각하면 된다. 말 그대로 자신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문학 작품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대화 중심 문학 수업의 경우는 학습자들의 주체적인 해석을 중요시 여기기에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서 열어 놓고 있다. 단,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면, 외부적인 근거를 통해서 자신의 해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문학에 있어 외재적 관점이라 일컬어지는 사회 맥락적 요소나, 작가의 개인적 생애와 같은 부차적 자료를 통한 이해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작품 내'에서의 근거에만 방점을 두는 것이다.

 

즉, 학습자 개인의 모든 해석은 '내적 근거'에 의해서 정당성이 보장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습자는 개인의 내적 대화를 바탕으로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를 수집하고, 이에 따른 적절한 해석을 선택한다.

 

해석이 끝이 났다면, '독자와 독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 공유하는 것이다. 역시나 자신의 해석을 말할 때에는 적절한 내적 근거를 통해서 발언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학습자들은 다양한 해석의 방향성을 인지할 수 있으며, 하나의 문학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심층적 이해의 단초를 제공 받는다.

 

그 다음에는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교사와 독자의 대화 부분에서는 독자들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수정해 주며, 잘못된 해석이 있을 경우 이를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내적 근거가 빈약하거나, 지나친 비약에 의해서 해당 작품을 해석할 경우 잘못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에 또한, 이러한 해석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기에 적절한 피드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때 교사는 학습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해석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해석의 방향성을 인지하고 이러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당 작품에 대해 최종적으로 의미를 정리하면서 수업은 마무리 된다.

 

일련의 수업 절차를 통해 대화 중심 문학 교수의 중요한 주의점을 뽑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작품에 대한 학습자의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중시해야 한다.

둘째, 문학 텍스트 해석에 대한 문학 감상자의 근거가 나타나야 한다.

셋재, 주체적인 문학작품 해석에 대한 감상 능력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2013년 객관식 문제와 2016년 서술형 문제에 대화 중심 문학 수업을 바탕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한눈에 답이 보이시죠? 본 수업의 경우는 외부적 자료가 아닌 오로지 문학의 내적 근거를 바탕으로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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