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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의 지향 '김동리'


 

국어과 교육과정을 살펴 보더라도, 항시 '사회 문화적인'  즉, 소통맥락 상에서 '반영론적' 관점 상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일이 정말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데 김동리는 문학이 시대의 거울이 되고,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달랐다.

 

김동리가 지향하는 문학세계 자체가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다루는 내용의 범주 또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이나 운명과 같은 순수한 것들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김동리는 1913~1995년까지 다른 문인들에 비해 꽤나 긴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지나쳐온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면면들이 그의 작품 속에는 녹아들어 있진 않다.

 

응당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라면, 일제의 수탈이나, 광복 후의 혼란상을 담은 작품들을 쓰기 마련이었지만, 김동리만큼은 달랐다.

 

그래서 그가 휘말렸던 논쟁이 바로 '순수 문학 논쟁'이다.

 

총 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 1차

 

당시 20대였던 김동리와 30대였던 유진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비평의 용어로 순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39년의 임화지만 이 말에 역동성을 부연한 것은 유진오다. 논쟁의 중요한 동기를 이룬 대목은 다음의 몇 줄이다.

 

나는 일개 문단인으로서 문학에 있어서의 순수라는 것을 생각하기에 요새보다 더 절실한 때가 없다. 순수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비문학적인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를 두고 말함이다. 문단의 사조가 전면적으로 혼돈 속에서 헤맬 때, 문학인, 지식인의 긍지와 특권을 유지, 옹호해 주는 것은 오직 순수에의 정열이 있을 뿐이다. (순수에의 향 - 특히 신인작가에 관하여)

 

유진오가 이와 같이 신인작가의 (당시 20대였던 김동리는 막 등단한 상황이었다.) 문학정신이 순수하지 못함을 지적했으며, 이런 지적을 통해 촉발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제 2차

 

두 번째 논쟁은 당시 30대 비평가인 김환태가 김동리의 논리에 동조하는 글을 발표하자, 그것을 다시 이원조가 반박한 30대끼리의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제 3차

 

세 번째의 순수문학 논쟁은 김동리와 김동석에 의해서 전개된다. 김동석이 <순수의 정체>라는 글을 통하여 순수문학의 논리적 맹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순수문학과 관련하여 순수함과 비순수함에 관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는 측면에선 상당한 의의를 지니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론자들이 문학의 독자성만을 내세우고 고집함으로써 문학이 당연히 포괄하여야 할 사회적, 역사적 현실이 배제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작게는 문학정신의 왜소화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지나치게 축소화한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논쟁에 말려든 만큼 김동리는 동반자 작가나 카프문학 즉, 특정 목적성을 띤 도식적 문학을 지양했으며, 참여문학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써 지금에까지 김동리는 '순수문학'의 큰 상징성을 갖고 있는 작가이며, 지나친 순수성의 추구가 후대의 평가에 있어 비판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견 김동리의 등단작인 '화랑의 후예'는 그의 거대한 문학관에 빗겨나가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의 심벌'로 대변되는 당대 무기력한 조선인의 모습 그리고 그 전형성을 갖고 관찰의 대상이 되는 '황진사'라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당대 조선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화랑의 후예'는 시대착오적인 발생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저 양반의 지나친 허세에 빠져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인칭 관찰자의 객관적 시점으로, 서술자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설상의 전개를 바탕으로 '조선의 심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숙부는 대종교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하는 등 일제 시대라는 암흑기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며, '황진사'에게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상당히 온정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극단에 서 있는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서도 '황진사'의 여러 일화와 대사와 행동들이 참, 우습거나 눈살을 찌푸르게 만든다.

 

그렇다 김동리의 순수문학의 세계관 속에서 '화랑의 후예'는 예외작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김동리는 황진사의 모습을 통해 전통이 왜곡되게 전달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기 보다는 조선의 전통 자체에 관심을 보이며, 그런 전통이 올바르게 계승 되기를 희구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렬하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전통 계승의 전형적 예시를 보여줌으로, 이러한 잘못된 사례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법으로 전통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이 외에 작품들 대표적으로 '등신불, 바위, 역마, 까치소리' 기구한 삶의 역정이나, 운명론적 세계관 등 인간 본연의 모습과 그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바위의 경우는 문등병에 걸린 여자의 기구한 삶의 모습, 역마의 경우는 역마살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총체적 언어교육


 

 

근래에 각광받고 있는 교수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부분에서 용어와 관련한 정리가 필요할 듯싶지만, 대체적으로 모형, 원리, 과정, 유형 등의 교육론과 관련한
단어들은
미세한 의미의 차는 있으나 같은 범주 내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총체성이라는 단어는 문학교과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총체성을 언어 교육에서 정의할 때 언어와 학습, 학습자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일련의 신념을 바탕으로,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상황(혹 자연적인 상황)에서 구어와 문어가 통합되어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교육을 말한다.
[국어교육학사전]

 

결과적으로 분절적으로 구분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의 하나를 지향하며, 나아가 실제적이고 상황에 적절한 구성주의적 지식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체성의 입장에서 수업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의 행태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분절된 부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서 그 맥락과 같이 제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총체성을 중요시 여기는 총체적 언어학습의 경우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중요시 여긴다.

 

전체성, 자연성, 통합성, 사회성

 

전체성이란, 말 그대로 부분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를 제시해 줘야 하며, 확장된 개념으로 학습자들의 부분적인 삶의 양태 보다는 이어지는 삶의 전체성의 측면에서, 단순 단위학교의 수업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로까지 연계되는 전체성을 뜻하는 것이다.

 

자연성이란, 전체성과 상당한 교집합을 형성하며, 있는 그대로의 학습자를 존중하면서 그들이 지니는 개인적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기존 교과서를 살펴 볼 경우 제시된 텍스트의 경우 일부가 생략 된 불완전한 텍스트가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총체적 언어학습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텍스트를 지양해야 하며, 작품 수다 다룰 수 있는 내용을 줄어든다 할지라도 전체를 제공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인간의 개작을 바탕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텍스트를 재단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통합성이란, 대표적으로 언어 기능간의 통합 이를 교과 내 통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과 간, 단위 학교와 지역 사회 간의 통합을 들 수 있다. 이는 최근 15개정 속에서도 연계라는 개념으로 잘 나타나 있다.

 

사회성이란, 언어 학습은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말 그대로 혼자 하는 학습이 아닌 집단 내에서의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학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해 봤을 때 총체적 언어학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학습자에 대한 신뢰가 형성 돼 있어야 한다.

또한, 전체주의적인 중앙 집권과 통제 보다는 학습자들의 개성화, 개별화 교육을 강조한다.

 

총체적 언어 학습에서 언어 학습에 대한 관점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야 한다.

둘째,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를 가르쳐야 한다.

셋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풍부히 하고 이 과정에서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하면 언어 학습은 촉진된다.

넷째, 실제 목적을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다섯째,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지나치게 형식이나 체계, 즉 문자나 맞춤법에 매몰되기 보다는 주어진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맞춤법을 등한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 언어 학습의 경우 특히 언어 기능을 사용하는 부분이나 문학 영역에서 많이 활용할 수 있다.

 

총체적 언어 학습을 하나의 철학이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이나 관점이 반영 된 구체적인 교수, 학습 방법으로는

 

: 쓰기 워크숍, 언어 경험 접근, 자유 독서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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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국어 교육론] 상호텍스트성  (0) 2018.03.04

 서정주, 귀촉도와 김소월, 접동새, 한국 문학의 전통적 특질의 계승


 

'문학'이라는 것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일견 두 단어가 사실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역설적 단어의 조합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한 이항대립의 관계로 이 둘의 관계를 바라보면 문학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선이 발생할 수 있기에 주의해아 한다.

 

문학에는 세계 공통적으로 그 안을 관통하는 보편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가령 문학의 소재로 삼는 것들의 보편적 특성, 언어로 형상화 되어 작가가 전달학고자 하는 특정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 등이 보편성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특수성이라 한다면, 사회 문화적인 맥락을 바탕으로 형성된 고유한 문화가 일궈낸 것들로 한국 문학의 경우는 '은근과 끈기', '자연친화적 사고', '웃음으로 눈물 닦기', '풍자와 해학', '이별의 정한', '한의 정서'등의 있을 것이다.

 

이중 오늘 다룰 두 시 '서정주의 귀촉도'와 '김소월의 접동새'는 '한의 정서'라는 한국문학의 고유한 문학적 특질을 계승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이라는 단어는 설명하기 굉장히 난해하고 힘든 단어이다. 단순하니 슬픔이나 좌절이 아닌, 피가 맺힐 듯한 단장의 슬픔과 그런 구구절절한 것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뭉쳐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으 설명하긴 했지만, 한의 전부를 설명한 것은 또 아니다.

 

 

대체적으로 문학적 전통적 계승의 그 계보를 그리자면 현대시 작가로는 김소월과 박제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이 대표적으로 한국 문학의 전통적인 소재들을 차용하여 시들을 만들어 냈으며, 문학적 특질을 잘 계승했다 하지만, 이 둘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고유한 한국 문학의 특질이 도출될 수 있다.

 

 

오늘 살펴보고자하는 시 두 시는 사실상 같은 제목을 같고 있다.

 

귀촉도 = 접동새를 뜻한다.

 

이는 두 시 다 접동새 설화라는 전통적인 설화를 차용하였으며, 그 설화 자체에 이미 한의 정서가 내재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시가 한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서정주,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밝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먼저, '은장도'라는 시어를 바탕으로 화자가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은장도라는 것은 여성의 정절을 지키는 수절의 도구로 사용 됐기에, 그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서역 삼만 리, 파촉 삼만 리 :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거리를 가시화하고 있으며, 그 거리가 좁힐 수 없는 즉, 임의 죽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거리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슬픔과 외로움은 '육날 메투리'라 하여, 자신의 머리로 엮은 신발을 통해 형상화 되고 있으며,

 

마지막 연의 귀촉도를 통해 감정 이입으로 한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주제를 도출하자면, '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회한'정도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바이 깊으면

이 산 저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사실상 김소월의 시가 접동새 설화에 더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해당 시의 내용이 바로 접동새 설화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접동새 설화

 

옛날 평북 진두강 가에 10남매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를 들였다. 흉악하고 포악한 계모는 전처의 자식들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죽은 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모두 없애고 그 자식들에게는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급기야는 외출도 금지시켰다.

소녀가 나이가 차서 박천의 어느 도령과 혼약을 맺고, 부잣집인 약혼자 집에서는 소녀에게 많은 예물을 주었는데,

이를 시기한 계모가 어느 날 그 예물을 빼앗고 소녀를 그 친어머니의 장롱 속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우자

그 재속에서 한 마리 접동새가 날아 올랐다.

누나의 죽음에 아홉 동생들이 슬퍼하면서 누나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는 아까워하며 태우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관가에서는 계모를 잡아 그 딸이 죽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형을 시켰는데, 계모의 재 속에서는 까마귀가 나왔다고 한다. 접동새가 된 처녀는 밤이면 동생들을 찾아와 울었는데,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까닭은 계모가 둔갑한 까마귀가 무서워서라고 한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김동인, 감자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경우 외국의 문학 사조를 수용하여 국내에 적용한 것이다.

사조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새로운 문학적 움직임으로, 그러한 움직임들의 수사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특정 유파를 형성하게 된다.

 

즉, 사실주의라는 명칭이나 자연주의라는 명칭에는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성이 내포해 있다는 뜻이다.

대게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는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조에 대한 반발이나, 사조들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반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작가들이 여러 외국 문학 사조들을 받여 들이지만, 외국의 상황과 국내의 상황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외국의 경우 100년을 기점으로 사조의 변화를 보이기에 꽤나 오랜 기간동안 해당 사조가 적립 되고 창작 되어지기 때문에 그 경계나 정체성 자체가 명확하다.

 

반면 국내의 경우는 10년을 주기로 하여 사조가 급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명확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전 다소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조에 흡수 되거나 혼재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실상 사실주의의 큰 틀 안에 자연주의가 포함 되기도 한다.

 

사실주의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존의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낭만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움직임으로 사실주의가 주창 되었으며, 낭만주의적인 색채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라는 명칭 보다는 사실 '리얼이즘'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현실의 문제나 현실의 상황을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그려내고자 노력했던 학파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 문학은 개인의 삶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한 개인의 삶이 사회에 의해 규명 되고 조건지워지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사회 역사적 관계를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인식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실주의의 경우 기존의 계몽주의적 성향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으며, 문학 자체의 순수성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계몽주의라는 것은 꿈에서 깨게 한다는 것으로, 이성의 빛으로 사람들의 무지몽매함을 쫓아낸다는 의미이다. 즉, 문명 개화나 근대적인 교육을 바탕으로 무지한 민중들을 깨우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교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교훈성으로 인한 교술적인 성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데, 그 대표자가 바로 이광수이다.)

 

자연주의

 

국내 문학에서는 사실주의와의 경계를 구분짓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주의를 계승, 강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의 경우 다윈의 진화론의 관점을 수용한 것입니다.

 

즉, 유전적 요인과 환경 결정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의 위압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국내 문학의 경우 자연주의의 대표자는 바로 '김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보시게 될 김동인의 '감자'와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죠.

 

자연주의의 경우 에밀 졸라에 의해서 처음 시행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주의를 졸라이즘이라고도 합니다.)

 

 

 

김동인, 감자

 

대략적인 이야기들을 숙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주요한 인물은 '복녀'입니다.

 

복녀라는 인물이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는 그 과정을 지켜 보면서, '자연주의'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대략적으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사농공상 중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꽤나 기품있는 예절에 대해 익힌 '복녀'였지만, 게으른 남편과 살게 되고 칠성촌 밖 빈민굴에서 생활하게 되변서 점점 타락해 갑니다.

 

결과적으로는 몸을 파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며, 왕서방과의 다툼을 통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복녀의 죽음 이후에도 굉장히 비정한 장면은 이어집니다. 복녀의 시체를 두고 돈과 돈이 오고 가며, 복녀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복녀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칠성촌 밖 빈민굴이라는 자연적인, 환경적인 요건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즉, 몸을 파는 행위 온갖 범죄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행위가 보편화된 환경이었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 지속적으로 노출 될 경우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또한 '복녀'라는 이름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전영택의 화수분과도 엮일 수 있는 것으로 이름 자체에서 오는 반어, '언어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동인에 대해서 짚고 넘아가자면, 김동인은 한국 문단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이광수를 넘어서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굉장한 경쟁심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살아온 환경 자체가 유복했지만, 중반부부터 병세가 짙어지고, 집안이 몰락하며 고생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김동인의 경우는 '인형 조종술'이나, '일원묘사법'으로 유명합니다.

 

'인형 조종술'의 경우 김동인이 말한 일종의 창작방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이나 행동들을 인형을 조종 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술가는 마치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작품을 창조하고, 그렇게 창조한 세계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동인은 인형 조종술을 얘기하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 언급 합니다. 세간의 평은 '도스토옙스키'가 더 좋지만, 김동인의 창작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톨스토이'가 더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는 자기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소설 속 세계에 오히려 이끌려 간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굉장히 난해하면서도,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 설명이긴 합니다.

 

'일원묘사법'

 

1) 일원묘사체 A형식

2) 일원묘사체 B형식

3) 다원묘사체

4) 순객관묘사체

 

김동인이란 인물이 대단한 것은 당대 시점이란 개념이 없었던 시절임에도 홀로 시점의 개념을 익히고 적립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어체의 사용을 도입하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등의 움직임을 통해 큰 족적을 남기게 된 인물이죠.

 

그 중 '일원묘사법'은 '시점'과 관련 있는 내용입니다.

 

1) 일원묘사체 A형식 : 주요 인물의 눈에 비친 내용만을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즉, 작가가 선정한 1인칭, 3인칭의 특정 인물의 시선에만 국한하여 서술해 나가는 방식이죠.

 

2) 일원묘사체 B형식 : 작품이란 커다란 덩어리를 쪼개어 각각의 덩이마다 다른 인물의 시점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에 한 부분씩 주요 인물로 바꾸어가며 쓰는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다원묘사체 : 이는 특정 부분을 끊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든 상관 없이 작품 속 어떤 인물이든 묘사가 가능한 즉 전지적 작가 시점과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순객관묘사체 : 작가가 중립적인 위치에 서 행동만을 묘사하는 지금의 작가 관찰자 시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의미 수용 과정으로서의 듣기

듣기 행위에 개입되는 사고 수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 가능하다.

 

소리 듣기, 문자 그대로 외부에서 들려오는 물리적인 소리만을 수동적으로 지각하는 활동 (축자적인 이해)

 

의미 듣기, 자신이 알고 있는 배경 지식과 관련하여 들은 정보를 조직화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련의 인지적 과정

 

청해, 가장 높은 수준의 사고를 요하며, 듣기 과정의 처리 결과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여기에 청자 자신의 가치 판단이나 정의적 반응까지 수반하는 종합적인 과정이다.

 

- 추론적 듣기

여러 요인들을 종합(언어, 비언어, 준언어, 맥락 등) 그 표현에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면서 듣는 방법을 말한다.

 

준언어, 언어적 표현과 분리된 음성적 요소 (음조, 강세, 목소리 크기 등)

비언어, 언어 표현과는 독립적으로 의미 작용을 할 수 있는 자세, 손동작, 몸동작, 얼굴 표정, 눈빛 등

 

- 비판적 듣기

청자 자신의 입장이나 관점을 견지하면서, 단순히 들은 정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

대방의 입장이나 견해에 대하여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듣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뢰성, 타당성, 공정성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신뢰성, 정보나 자료의 출처가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타당성, 그 말이 전후 맥락에서 자료나 근거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합리적인지, 현실이나 삶의 이치에 부합되는지 등을 따지는 것

공정성, 말의 내용이나 주장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 공감적 듣기

내 입장에서 상대방의 말을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입하여 상대방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해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는 너 중심 듣기라 할 수 있다.

들어주기(공감적 듣기의 시작이다.), 소극적 들어주기와 적극적 들어주기가 있다.

소극적 들어주기, 상대방에게 관심을 표명하면서 화자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화맥을 조절해 주는 격려하기 기술

 

<소극적 들어주기의 다양한 표현>

 

관심 표현 : 그래서?, 그런데?

공감 표현 : 그러게 말이야, 정말 그렇고 말고

동정 표현 : 저런, 쯧쯧

기쁨 표현 : 정말 잘 됐다, 멋지다.

놀라움 표현 : 어머, 정말?

 

적극적 들어주기, 청자가 객관적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화자의 말을 요약, 정리해 주고 반영해 주는 역할을 통해서 화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 공감적 듣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판하거나 윤리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수용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상대방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줘야 한다.

 

이형기 폭포, 김수영 폭포


 

오늘은 동일한 제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두 편의 시를 보겠습니다.

 

역시나 동일한 제재 혹은 소재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시의 경우 당연히 상호텍스트적인 관점 속에서 묶일 수 있겠죠.

 

그렇다면 먼저 이형기의 폭포를 보겠습니다.

 

폭포 -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특이한 점은 전면에 나오는 목소리가 바로 '폭포'라는 것입니다. '그대'라는 청자를 상정하여 계속하여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대략적으로 폭포의 그 형상을 비유적 표현을 바탕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상화의 방식을 하나하나 드려다보게 된다면,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선명한 언어들을 바탕으로 한 편의 시가 직조 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자욱'이라든가, '박살나는' 등의 표현을 통해서 강력한 생명력을 형상화 시킨다기 보다는, 폭포 그 자체의 비극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폭포'라고 불리는 대상의 숙명적 고통이자, 실존적인 고통인 것이죠. 결과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슬픔과 비극을 폭포를 통해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폭포라는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겪어야 하는 실존적인 고통의 모습, 인간이기 때문에 거쳐야 하고, 겪어야 하는 수 많은 고통을 폭포와의 유사성 속에서 풀어나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김수영의 폭포의 경우 '폭포'라는 대상 자체는 예찬의 대상이자, 지향하는 존재입니다. 즉, 닮고싶은 존재인 것이죠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해당 시에서 폭포라는 존재는 '무서운 기색도'없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는 고매한 정신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폭포라는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구라고 한다면 다음 부분일 것이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 곧은 소리는 곧은 /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성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강렬하게 내리 꽂히는 폭포의 생명력과 맞 닿으며, 살아 있는 정신, 곧은 정신 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나타와 안정'과 같이 현재에 만족하여 정적으로 멈춘 삶의 모습을 추구하기 보다는, 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인하면 떠오르는 시는 '눈'이나 '풀'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자연의 속성을 바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는 방식을 많이 취했으며, 정적이기 보다는 동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끊임 없는 운동감을 보여주는 시인이기도 하다.

 

김수영 시인도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빠져들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과정은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를 바탕으로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그렇다 김수영이란 시인은 현실에 참여하며, 강렬한 운동성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중략) 그러면 온몸으로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중에서

 

 

동일한 제재를 바탕으로 시를 쓴다고 하여도, 작가의 의식과 관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주제 의식을 형상화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독서 모형


독자가 독서라는 문제행위를 수행할 때 언제 모형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모형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양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범주화하여 묶어 놓은 것을 말하는 것인데, 대체적으로 지지하는 기본적인 입장들이 있으며, 그러한 입장들의 구체적 설계를 바탕으로 모형을 형성하였다. 

 

 

상향식 모형, 작은 언어 단위로부터 점차 큰 언어 단위로 올라가면서 이루어진다. (언어 단위에 따라 단어-문장-문단-) 문자 판독이 의미 형성의 원천을 이룬다. 이에 독자의 역할이 수동적이다.

 

(비판점)

첫째, 단어 지각 과정에서 문장의 통사 구조의 효과나 의미의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도 상향식 모형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둘째,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 문맥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하향식 모형, 독자의 스키마, 가정이나 예측과 같은 상위 차원의 자원이 글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의미 구성이 독자의 적극적인 가정이나 추측에서 이루어지며, 글의 의미 해석도 독자의 가정이나 추측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스키마의 사용)

 

(비판점)

첫째, 하향식 모형은 능숙한 독자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능숙하지 못한 독자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둘째, 독자의 능동적 행동이 하향식 모형 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로는 비효율적이다.

 

상호 작용 모형, 상향식과 하향식의 절충이며, 독서를 글과 독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작용의 행위로 간주한다. 독자의 의미 구성 과정은 글이 개입하면서 정교해지고, 글의 의미는 독자의 적극적인 가정과 추론이 개입하면서 활성화된다.

 

(비판점)

첫째, 독서가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둘째, 초인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대두된 모형으로 그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형이 바로 사회 문화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사회·문화 모형, 독자 개인 차원, 지역이나 국가, 민족과 같은 사회 차원, 학교나 직장, 학회와 같은 기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 가치나 신념, 역사, 언어, 의사소통 방식 등을 뜻한다. 동일한 글을 읽더라도 개인마다 글의 의미 구성이 다른 이유가 바로 사회, 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 문화 모형에서는 확장된 논의를 바탕으로 독서의 환경적 여건까지 포함 시킨다.

 

 

환경적 여건이라고 한다면, 심리적인 환경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 독서가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환경이 있다.

 

심리적인 환경이라 한다면, 가정 내에서 책을 읽는 독서의 분위기가 형성이 되거나, 실제로 원하는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성이 높은 여러 정의적 동인과 관련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책을 읽기에 적합한 물리적 환경 (조명의 밝기나, 의자의 편안함 등)이 갖춰져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회 문화라는 그 단어에 맞게 상당히 거시적이면서도, 면밀히 맥락의 영향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점)

 

첫째, 사회·문화적 요소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둘째, 사회·문화적 요소의 차이가 있음에도 글의 의미를 동일하게 이해하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우치전, 허균의 홍길동전


 

 

 

아무래도 전우치의 평균적인 이미지와 대중성을 올려 놓은 것은 바로 이 전우치라는 영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전우치를 배우인 강동원이 연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미지 자체가 긍정적으로 형성될 것이다.

 

이에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전우치의 이미지는 자유로우며, 장난기 많은 그리고 신이한 도술을 부리는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오늘 살펴 볼 전우치전의 경우도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전우치 설화'이다.

 

설화의 원형적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여러 삽화를 삽입하고, 병렬 나열하는 방식의 '삽화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사실 공부를 하다보면, 삽화식 구성의 개념과 액자식 구성의 개념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러한 모호성에 기인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구성'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붙어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구성 다른 말로 바꾸자면 '플롯'이 여기에 해당한다. 플롯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견 스토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E. M. 포스터는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스토리는 시간적 순서대로 배열된 사건의 서술이다.

플롯도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 관계에 중점을 둔다.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하는 것은 스토리이지만,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하는 것은 플롯이다. 시간적 순서는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인과 관계가 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가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다면, 이것은 신비를 간직한 플롯이며, 고도의 발전이 가능한 형식이다.

플롯은 소설의 논리적이고 지적인 단면이다.

 

플롯은 일종의 설계도 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대한 하나의 직조물 혹은 건축물인 소설을 건설해 내기 위해, 그 내부 구조부터 외형에 이르기까지 단단하게 설계해 나갈 때 그것들의 짜임새를 플롯이라 하는 것이죠.

 

플롯의 간단한 개념에 대해 살폈으니, '삽화적 구성'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삽화'라는 것은 책을 읽다 보시면, 중간 중간에 끼어 있는 그림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사건들이 서로 밀접한 관련성 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산만하게 연결된 직선적 구성의 한 방식입니다.

 

반면 액자식 구성은 외화와 내화로 구성 돼 있으며, 외화와 내화과 유기적인 연관관계 속에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고전 소설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환몽구조'를 갖고 있기에 각몽과 입몽의 단계를 바탕으로 액자식 구성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화에서 겪은 핵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그 과정을 서술하는 몽자류 혹은 몽유록계 소설들이 즐비하기에, 삽화적 구성과의 차이는 상당히 명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우치전'의 경우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커다란 '전우치'와 관련한 일대기적 서사라는 보편적인 서사가 관통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작은 삽화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일례로 도적을 소탕하는 삽화(엄준 토벌 삽화), 역모 누명 삽화 등의 삽화들이 배열이 돼 있으며, 이들의 사건들은 모두 '전우치'의 신이한 도술과 능력을 통해 독자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전우치전에서 조력자의 역할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특정 인물의 조력을 바탕으로 도술을 익히고 나아가, 조력자의 도움을 통해 대업을 이루는 방식이 영웅의 서사적 일대기의 한 양상임에도, 전우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이한 능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전기성'의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의 입장을 통해 허균의 홍길동전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저는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바로 인물의 도덕성 측면입니다.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은 굉장히 많습니다. 대체로 결연담이나, 혼사장애담과 같은 화소에서 신분적 제약과 개인적 사랑의 욕구가 부딪치며, 좌절하거나 이를 초월하고 극복해 사랑을 이루는 방식이 많죠.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전우치라는 인물이 자신의 도술로써 탐관오리를 벌하고 빈민을 구제하며 도적을 물리치는 등의 영웅적 면모를 보이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하는 등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도 도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습의 영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점이 바로 홍길동전과 만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홍길동도 활빈당을 구성해 의로운 일을 해 나가지만, 마지막 부분에 율도국을 정복하는 과장을 보시면 상당히 비윤리적이란 인상이 강합니다.

 

율도국의 경우 왕이 폭정을 일으켜 백성들이 힘든 시절도 아니었으며, 굉장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임에도 홍길동은 자신의 힘으로 율도국의 왕위에 오른다는 측면이 조금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개인적인 욕망과 윤리성이 부딪치는 측면으로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윤리성을 억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완벽한 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영웅이란 부분이 전우치전과 홍길동전의 공통점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에 입각해 묶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석, 모닥불과 안도현, 모닥불


 

 

 

모닥불이라고 한다면,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을 내뿜는 것으로 일견 현대의 난방기구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닥불'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당히 서정적으로 만들며, 타오르는 불길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는 묘한 매력을 지니기도 했다.

 

이런 모닥불이란 소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두 개의 시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은 상호텍스트의 입장에서 살피자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늘 초점을 맞출 부분은 '백석'이라는 시인이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매력적이며 준수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백석의 생애를 톺아볼 경우 항상 여성편력과 관련한 사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곤 한다.

 

성북동에 있는, 법정 스님으로 유명한 길상사라는 절의 경우도 백석과 간접적인 영향관계를 맺고 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의 보시로 만들어진 거대한 절이라는 말이 있기에... 하지만 백석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매력은 자신의 가정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군사분계선 일명 삼팔선으로 갈리며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결정되는 순간, 타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납북되게 되는 나름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백석의 시들을 생각해 본다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공동체', '토속' 등등

 

따뜻하고 옛스러운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이다.

또한, 시어들은 방언으로 쓰여 있기에 사실 지금의 독자들에겐 오히려 낯선 외국어쯤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 사용은 백석 나름의 정신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지키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민족의 혼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잃는 다는 것은 한 나라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며, 일제 제국주의의 식민지 기간이 끝나고 난 후에도 반드시 언어가 바로서야 한다는 강렬한 관념이 백석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서는 토속적이고 정감이 가는 소재들과 언어들로 구성 돼 있는 것이다.

 

백석의 경우 대부분 두 가지의 주제 의식으로 굳어진다.

 

1. 공동체의 따스함과 추억

2. 공동체의 해체와 파괴에서 오는 안타까움, 쓸쓸함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쓰려고 한 것이다.

 

조금 더 백석에 관한 지식을 말하자면, 백석도 모더니즘의 경향성을 지닌 작가라 할 수 있다.

 

의아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도시적인 감성을 기초로 하여 기존의 문학 형식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대표자로 '김광균'을 들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의 사용과 객관적 관찰을 통한 묘사가 주로 쓰이며, 천변풍경과 같은 작품에서는 '카메라 아이 기법'이라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속성이라면 백석과 모더니즘의 경향성은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나, 백석은 향토성을 지닌 모더니스트로 분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백석의 모닥불을 감상해 보자.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지금 편의상 행을 구분했지만, 3연 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굉장히 길게 사물들이 나열 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한 연이 한 행이 되고 한 문장이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이라고 한다면, 원형상징의 입장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걔중에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파괴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만, 모닥불 속에 들어가 하나로 얽여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해당 시를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즉, 1연은 농촌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그러한 일상의 것들이 '모닥불'이라는 매개체를 바탕으로 한 대 어우러지는 화합을 일으킴을 알 수 있다. 2연은 이러한 화합의 모닥불 앞에 둘러 앉아 모닥불에 쬐고 있는 여러 사람들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 3연의 경우 모닥불의 속성이 조금 변화를 보이는듯 하다. '모닥불'을 매개로 하여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모닥불로 인해 '뭉둥발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역사'에 대해서 듣게 된다. '뭉둥발이'는 불에 의해서 발가락이 붙어버린 장애를 뜻하는 단어이다.

3연의 모닥불을 통해서는 비극적인 민중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모닥불을 통해 화즌 화합된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를 정리하자면, 조화와 평등의 공동체적 합일 정신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안도현의 '모닥불'을 살펴볼 차례이다.

 

 

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모닥불은 피어오른다'라는 동일한 문장의 반복, 1연의 경우는 '-에서'의 반복, 2연에서는 '-에'의 반복을 통해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복은 운율의 형성뿐만 아니라 의미를 강조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에서'라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특정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즉, 모닥불이 타오르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됨을 알 수 있으며, 2연에서는 '-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을 통해 모닥불이 타오르는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거나 평범한 장소나 시간 속에서 혹은 안정과 나태의 시간 속에서 타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닥불은 한 그루의 '향나무'같이 고고하면서도,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양상을 바탕으로 모닥불이 두 시 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 됨을 알 수 있다.

 

엄밀히 그 긍정적인 속성을 구분하자면,  백석의 모닥불은 조화와 화합의 모닥불이며, 안도현의 모닥불은 희망을 갖게 하는 모닥불이다.

 

 

 

 

 

상호텍스트성


 

공부를 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듣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상호텍스트성'입니다.

 

그렇기에 해당 용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 하겠죠?

 

이에 해당 용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합니다.

 

'상호텍스트성' 간단히 말하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텍스트'라는 것은 상당히 넓은 관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이 향유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대체적으로 이 텍스트란느 개념 안에 포함이 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즉, 이러한 텍스트들간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상호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호텍스트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독자적으로 형성 된 텍스트란 것은 없습니다.

 

특정 작품이나, 글의 경우 개별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텍스트 자체로 인식될 수 있으나, 이는 연속되는 무한한 텍스트의 우주 속에서 연속되는 일부로 파악하셔야 됩니다.

 

종합하자면, 모든 텍스트들은 그 상호관계 속에서 연속적으로 위치해 있으며 개별적이고 독창적으로 보이는 텍스트의 경우도 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텍스트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간텍스트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상호 텍스트성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모든 상호관계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텍스트 사이의 인용, 표절, 복사, 모방, 혼성, 모방, 패러디, 의견 일치, 의미 중첩, 혼합적 의견 강화, 목소리의 배합과 중첩 등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다양한 영향과 수용관계를 비롯하여 거대한 텍스트들의 우주에서 의미론적 상관 관계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상호 텍스트성은 하나의 담화 사이에서의 응답 관계를 시작으로 한 작가의 작품들의 관계와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 사이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장르를 초월한 모든 문학작품과 타 예술 텍스트와의 상호 연관 관계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모든 텍스트는 독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텍스트와 후텍스트 사이에서 영향과 수용의 관계 고리를 형성하면서 의미 작용과 표현 작용을 암암리에 주고받은 결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문학이나, 독서 부분에서 해당 개념이 잘 나타납니다.

 

도종환 시인이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세한도라는 그림을 보고서 '세한도'라는 시를 썼으며,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과 같이 연관관계를 갖는 무한한 텍스트의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외에도 독서에도 상호텍스트성을 강조하여 '주제통합적독서'를 강조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여러 책을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대상과 특정 문제 상황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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