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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전, 허균의 홍길동전


 

 

 

아무래도 전우치의 평균적인 이미지와 대중성을 올려 놓은 것은 바로 이 전우치라는 영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전우치를 배우인 강동원이 연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미지 자체가 긍정적으로 형성될 것이다.

 

이에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전우치의 이미지는 자유로우며, 장난기 많은 그리고 신이한 도술을 부리는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오늘 살펴 볼 전우치전의 경우도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전우치 설화'이다.

 

설화의 원형적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여러 삽화를 삽입하고, 병렬 나열하는 방식의 '삽화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사실 공부를 하다보면, 삽화식 구성의 개념과 액자식 구성의 개념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러한 모호성에 기인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구성'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붙어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구성 다른 말로 바꾸자면 '플롯'이 여기에 해당한다. 플롯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견 스토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E. M. 포스터는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스토리는 시간적 순서대로 배열된 사건의 서술이다.

플롯도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 관계에 중점을 둔다.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하는 것은 스토리이지만,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하는 것은 플롯이다. 시간적 순서는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인과 관계가 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가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다면, 이것은 신비를 간직한 플롯이며, 고도의 발전이 가능한 형식이다.

플롯은 소설의 논리적이고 지적인 단면이다.

 

플롯은 일종의 설계도 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대한 하나의 직조물 혹은 건축물인 소설을 건설해 내기 위해, 그 내부 구조부터 외형에 이르기까지 단단하게 설계해 나갈 때 그것들의 짜임새를 플롯이라 하는 것이죠.

 

플롯의 간단한 개념에 대해 살폈으니, '삽화적 구성'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삽화'라는 것은 책을 읽다 보시면, 중간 중간에 끼어 있는 그림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사건들이 서로 밀접한 관련성 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산만하게 연결된 직선적 구성의 한 방식입니다.

 

반면 액자식 구성은 외화와 내화로 구성 돼 있으며, 외화와 내화과 유기적인 연관관계 속에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고전 소설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환몽구조'를 갖고 있기에 각몽과 입몽의 단계를 바탕으로 액자식 구성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화에서 겪은 핵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그 과정을 서술하는 몽자류 혹은 몽유록계 소설들이 즐비하기에, 삽화적 구성과의 차이는 상당히 명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우치전'의 경우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커다란 '전우치'와 관련한 일대기적 서사라는 보편적인 서사가 관통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작은 삽화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일례로 도적을 소탕하는 삽화(엄준 토벌 삽화), 역모 누명 삽화 등의 삽화들이 배열이 돼 있으며, 이들의 사건들은 모두 '전우치'의 신이한 도술과 능력을 통해 독자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전우치전에서 조력자의 역할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특정 인물의 조력을 바탕으로 도술을 익히고 나아가, 조력자의 도움을 통해 대업을 이루는 방식이 영웅의 서사적 일대기의 한 양상임에도, 전우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이한 능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전기성'의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의 입장을 통해 허균의 홍길동전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저는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바로 인물의 도덕성 측면입니다.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은 굉장히 많습니다. 대체로 결연담이나, 혼사장애담과 같은 화소에서 신분적 제약과 개인적 사랑의 욕구가 부딪치며, 좌절하거나 이를 초월하고 극복해 사랑을 이루는 방식이 많죠.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전우치라는 인물이 자신의 도술로써 탐관오리를 벌하고 빈민을 구제하며 도적을 물리치는 등의 영웅적 면모를 보이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하는 등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도 도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습의 영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점이 바로 홍길동전과 만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홍길동도 활빈당을 구성해 의로운 일을 해 나가지만, 마지막 부분에 율도국을 정복하는 과장을 보시면 상당히 비윤리적이란 인상이 강합니다.

 

율도국의 경우 왕이 폭정을 일으켜 백성들이 힘든 시절도 아니었으며, 굉장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임에도 홍길동은 자신의 힘으로 율도국의 왕위에 오른다는 측면이 조금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개인적인 욕망과 윤리성이 부딪치는 측면으로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윤리성을 억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완벽한 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영웅이란 부분이 전우치전과 홍길동전의 공통점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에 입각해 묶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월부터 사용할 새 교과서, 학생 참여 중심으로 바뀐다.


 

교육부 보도자료에 의거하여 작성했습니다.

 

2015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1학년 등 일부 학년을 대상으로 개발 돼 이번 3월 전면적으로 보급 되었습니다.

 

앞으로 고등학교 2학년 이후 선택과정 교과서도 개발 돼 보급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새 교과서학습량을 적절하게 줄이고, 실제 배움이 일어나는 학생 활동과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경험을 단계적으로 제시하여 공교육에서 미래사회의 핵심역량*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으며,

 

* 핵심역량 :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이를 통해 과도한 학습 분량, 학생의 흥미참여 유도에 부적합구성, 일상생활과 괴리 제재와 활동 등 현장 전문가들이 우려하던 기존 교과서의 문제점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확실히 15개정 교육과정 해설서만 보더라도, 2009, 2011년에 비해서 거의 반 가까이 줄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경우 한국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양의 학습량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새로운 교과서의 경우 진로지도와 독서를 연관시켜,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고 나아가 진로의 청사진에 명확한 색채를 입힐 수 있는 책을 선정하는 등의 실제적 삶과의 연계적 교육을 강조하기도 한다.

 

 

 

프린팅된 텍스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권장하고 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로 국어 능력자 되기!

(국어) 실제 읽기보다 읽기에 대해’, ‘쓰기보다 쓰기에 대해공부하는 대신, 국어 시간에 책 한 권을 선정하여 읽고, 그 과정에서 친구들과 토의하고, 결과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활동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실질적인 국어 능력을 기르도록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교육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백석, 모닥불과 안도현, 모닥불


 

 

 

모닥불이라고 한다면,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을 내뿜는 것으로 일견 현대의 난방기구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닥불'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당히 서정적으로 만들며, 타오르는 불길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는 묘한 매력을 지니기도 했다.

 

이런 모닥불이란 소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두 개의 시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은 상호텍스트의 입장에서 살피자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늘 초점을 맞출 부분은 '백석'이라는 시인이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매력적이며 준수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백석의 생애를 톺아볼 경우 항상 여성편력과 관련한 사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곤 한다.

 

성북동에 있는, 법정 스님으로 유명한 길상사라는 절의 경우도 백석과 간접적인 영향관계를 맺고 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의 보시로 만들어진 거대한 절이라는 말이 있기에... 하지만 백석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매력은 자신의 가정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군사분계선 일명 삼팔선으로 갈리며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결정되는 순간, 타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납북되게 되는 나름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백석의 시들을 생각해 본다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공동체', '토속' 등등

 

따뜻하고 옛스러운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이다.

또한, 시어들은 방언으로 쓰여 있기에 사실 지금의 독자들에겐 오히려 낯선 외국어쯤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 사용은 백석 나름의 정신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지키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민족의 혼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잃는 다는 것은 한 나라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며, 일제 제국주의의 식민지 기간이 끝나고 난 후에도 반드시 언어가 바로서야 한다는 강렬한 관념이 백석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서는 토속적이고 정감이 가는 소재들과 언어들로 구성 돼 있는 것이다.

 

백석의 경우 대부분 두 가지의 주제 의식으로 굳어진다.

 

1. 공동체의 따스함과 추억

2. 공동체의 해체와 파괴에서 오는 안타까움, 쓸쓸함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쓰려고 한 것이다.

 

조금 더 백석에 관한 지식을 말하자면, 백석도 모더니즘의 경향성을 지닌 작가라 할 수 있다.

 

의아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도시적인 감성을 기초로 하여 기존의 문학 형식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대표자로 '김광균'을 들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의 사용과 객관적 관찰을 통한 묘사가 주로 쓰이며, 천변풍경과 같은 작품에서는 '카메라 아이 기법'이라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속성이라면 백석과 모더니즘의 경향성은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나, 백석은 향토성을 지닌 모더니스트로 분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백석의 모닥불을 감상해 보자.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지금 편의상 행을 구분했지만, 3연 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굉장히 길게 사물들이 나열 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한 연이 한 행이 되고 한 문장이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이라고 한다면, 원형상징의 입장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걔중에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파괴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만, 모닥불 속에 들어가 하나로 얽여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해당 시를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즉, 1연은 농촌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그러한 일상의 것들이 '모닥불'이라는 매개체를 바탕으로 한 대 어우러지는 화합을 일으킴을 알 수 있다. 2연은 이러한 화합의 모닥불 앞에 둘러 앉아 모닥불에 쬐고 있는 여러 사람들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 3연의 경우 모닥불의 속성이 조금 변화를 보이는듯 하다. '모닥불'을 매개로 하여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모닥불로 인해 '뭉둥발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역사'에 대해서 듣게 된다. '뭉둥발이'는 불에 의해서 발가락이 붙어버린 장애를 뜻하는 단어이다.

3연의 모닥불을 통해서는 비극적인 민중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모닥불을 통해 화즌 화합된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를 정리하자면, 조화와 평등의 공동체적 합일 정신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안도현의 '모닥불'을 살펴볼 차례이다.

 

 

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모닥불은 피어오른다'라는 동일한 문장의 반복, 1연의 경우는 '-에서'의 반복, 2연에서는 '-에'의 반복을 통해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복은 운율의 형성뿐만 아니라 의미를 강조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에서'라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특정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즉, 모닥불이 타오르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됨을 알 수 있으며, 2연에서는 '-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격조사의 반복을 통해 모닥불이 타오르는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거나 평범한 장소나 시간 속에서 혹은 안정과 나태의 시간 속에서 타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닥불은 한 그루의 '향나무'같이 고고하면서도,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양상을 바탕으로 모닥불이 두 시 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소재로 사용 됨을 알 수 있다.

 

엄밀히 그 긍정적인 속성을 구분하자면,  백석의 모닥불은 조화와 화합의 모닥불이며, 안도현의 모닥불은 희망을 갖게 하는 모닥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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